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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만 칼럼] 지도자 기사의 사진
세계 제1차대전 후 당시 제네바국제연맹 지적협력위원회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 소개된 작가로 공인했던 오스트리아의 스테판 츠바이크는 전쟁을 일으킨 나라의 국민으로 잘츠부르크에 파묻혀 살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불구대천의 적’으로 간주당할 각오를 하고 이탈리아로 갔다. 베로나의 호텔에 도착한 그는 숙박계에 ‘아우스트리아코(오스트리아인·Austriaco)’라고 썼다. 프런트의 사나이는 “정말 아우스트리아코입니까?”하고 물었다. 츠바이크는 사나이가 당장 나가 달라고 문을 가리킬 것으로 예상하며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사나이는 “드디어 오셨군요!”하고 감격적으로 소리쳤다. 츠바이크는 전쟁 후 그 호텔에 찾아온 첫 오스트리아인이었다.

다음날 츠바이크는 밀라노로 갔다. 그는 거리를 지나다 ‘세라통신사’라는 간판을 보았다. 츠바이크는 그 통신사 편집부에 근무했던 이탈리아 친구 보르게제(작가·문학평론가)가 생각나 통신사에 호텔 주소를 기록한 명함을 남기고 내려왔다. 그때 누군가 그를 쫓아내려왔다. 보르게제였다. 두 사람은 서로 깊은 포옹을 나누었다. 츠바이크의 자서전 ‘어제의 세계’에 나오는 내용이다.

1932년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는 소렌토섬에서 휴양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낭만적 혁명주의에 심취한 일단의 볼셰비즘 청년들이 고리키를 만나러 왔다. 그들은 러시아식 형제애적인 사고방식으로 작가는 언제든지 자신들을 만나줄 것이라고 믿은 나머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청년들은 쾌적한 고리키의 별장에 들어서자마자 “어째서 당신은 여기서 살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고리키는 자신의 폐가 얼마나 나쁜지를 설명했다. 청년들은 다시 “당신은 부르주아와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고리키는 당에 대한 의향(충성도)을 시험하려 하는 청년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진심을 다해 설명했다. 고리키도 청년들과 함께 당장 배를 타고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들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마침내 고리키를 이해한 청년들은 헤어질 때는 번갈아가며 서로를 껴안았다. 고리키는 이 새로운 세대의 자유로운 행동을 기특하게 여긴 나머지 그들의 무분별한 행동에 조금도 감정을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세대와는 다른 활기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고리키는 이렇게 썼다. “우리 세대는 소심했고, 저런 확신을 갖지 못했었다!”

모든 증오와 선전·선동은 국가나 계층 사이에서 일으키는 의도적 분열일 뿐 근본적으로 대중들은 영향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에피소드다.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갈 창의력은 저런 사고방식에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지금 남과 북은 6·25전쟁 후 최고의 적대관계에 있으며, 일본과는 ‘겨울연가’의 바람이 사라지고 증오가 대체되고 있다. 우리 내부적으로는 보수와 진보 진영이 전쟁 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국민들보다 더 원수지간이 되어 있다.

우리 내부의 분열이 이렇게 심하다면 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점점 더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살게 되는가. 청년들의 방문과 질문이 무례하더라도 문을 닫아걸지 않고 그들에게서 감명 받은 고리키처럼 세월호 유가족의 주장이 과도하더라도 문을 닫지 않고 그들이 겪은 비극과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이 땅의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탄력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에 번져 있는 적대감은 심각하다. 지금은 하나하나 따져서 나와는 다른 사람을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되도록 화해의 씨를 뿌리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올 봄 타계한 스페인어권 최고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권력자는 명성 때문에 고독해진다고 했다. 고독해진 지도자는 위험하다는 것, 그렇기에 친구들이 항상 고립에서 지켜주어야 한다고 했다. 친구들이란 같은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임순만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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