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한홍] 분노 절제하고 큰 그림을 보자 기사의 사진
저명한 크리스천 작가 필립 얀시는 “동일하지만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명백하게 다른 두 집단이 만들어내는 증오보다 오히려 더 지독한 증오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했다. 예수님 시대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의 피가 반이나 섞인 사람들이었는데도, 유대인들은 그들을 짐승처럼 경멸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왜 르완다의 후투족과 투치족, 중동의 시아파와 수니파 무슬림들이 그토록 서로를 증오하는지 말이다.

이웃과의 반목·갈등 바람직하지 않아

내가 미국에서 살 때 미국인들은 왜 한국인과 일본인은 바로 이웃에 살면서 그렇게 서로 간에 벽이 높은지 모르겠다고 하기에 나는 미국인들은 왜 백인과 흑인이 수백년간 같이 살면서도 그렇게 벽이 높으냐고 반문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끼리 그토록 날카롭게 반목하는 것은 서로 간에 빈번하게 접촉하면서 주고받은 상처들이 쌓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이 “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고 “내 원수를 사랑하라”고도 하신 것은 바로 이웃이 원수같이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일본과 북한은 가까운 데 있으면서도, 너무나 많은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증오와 불신의 상대인 것 같다. 그래서 이 두 나라를 대할 때 우리는 대부분 냉정을 잃고 감정적으로 대해 상황을 힘들게 만들고 있다.

한국 크리스천들은 일본과 북한 품어야

최근 한국 검찰이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을 불구속 기소한 것도 그렇다. 산케이는 일본에서도 별로 높이 평가받지 못하는 극우신문으로 한국과 중국을 공격하는 것으로 먹고 산다는 소리까지 듣는다. 산케이가 우리 대통령을 모욕한 것은 분명히 화나는 일이지만, 거기에 대해 우리 검찰은 지나치게 반응함으로써 저질스러운 산케이를 탄압받는 민주언론의 수호신처럼 일본의 다른 언론사들이 치켜세우는 빌미를 제공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베에게 찬바람이 불 정도로 대하는 것도 그렇다. 그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극우성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베를 향한 분노를 원초적으로 드러내면 득보다 실이 크다. 산케이나 아베 같은 극우주의자들은 일본 국민의 절대 다수가 아니다. 따라서 그들을 향해 분노를 표출해 버리면 절대 다수인 중도파 일본인들까지 일본이라는 깃발 아래 뭉치게 해 줄 빌미가 될 뿐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에서 살아야 하는 수많은 재일교포들과 일본과 장사해야 하는 수많은 한국 기업들이 그 고통을 떠안아야 한다.

구약성경에 보면 반란군에게 수도 예루살렘을 빼앗기고 쫓겨 가는 다윗왕 일행을 향해서 베냐민 지파의 시므이라는 사람이 온갖 저질스러운 욕설을 다 퍼부으면서 모욕하는 장면이 나온다. 부하들이 당장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펄펄 뛰었으나 다윗은 그런 부하들을 제지하며, 의연하게 그냥 지나간다. 다윗이 만약 시므이를 죽였더라면 시므이와 같은 수준의 사람으로 전락했을 것이고, 안 그래도 적대적인 베냐민 지파 전체를 적으로 만들어서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순간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여 적을 영웅으로 만들어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당장 터지는 분노를 절제하며, 좀 더 큰 시각에서 장기를 두어야 한다. 진짜 이기는 길은 일본보다 더 정직하고, 더 건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국제사회와 끊임없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구축해 나가며,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평화와 정의, 약자를 향한 배려 등 절대가치들을 일본의 온건파 국민들에게 계속 전달하면서 소수 극우파들이 일본 내에서 자연스럽게 고립되고 도태되게 해야 한다.

교회의 사명은 한 걸음 더 나간다. 초기 선교사들이 묻힌 양화진에 가 보면 단 한 명의 일본인 소다 가이치의 묘소가 있다. 3·1운동 당시 일본의 만행을 비판했고, 평생을 한국의 고아들을 돌보았던 가이치만 보아도, 우리는 인간의 힘이 아닌 하늘의 능력으로 일본에 대한 증오를 계속 갖고 가선 안 될 것 같다. 한국 크리스천들에게 일본과 북한을 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제다.

한홍 새로운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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