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고승욱] 성수대교, 20년 전 이야기 기사의 사진
20년 전 그제는 성수대교가 무너진 날이다. 한강 다리가 아침 출근시간에 뚝 끊어졌다. 정부 발표대로 말하면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38분 서울 압구정동과 성수동을 연결하던 길이 1160m 성수대교 10번과 11번 교각 사이 상판 48m가 붕괴됐다.

수습기자 생활을 끝내고 정식 기자로 발령을 받은 지 3개월쯤 됐을 때였다. 하필이면 성수대교를 관할하는 서울 동부경찰서(현 광진경찰서)가 출입처였다. 그날 아침 경찰서 형사계에서 안면이 있는 경찰관 ‘형님’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기자실로 갔을 때 팀장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다리에서 버스가 떨어졌는데 상황 파악해서 보고해.” 그 후 몇 달은 어떻게 지냈는지 모른다. 현장과 병원, 경찰서를 오가며 취재하고 기사 쓰기를 무한 반복했을 터였다.

다리 상판과 함께 한강으로 떨어진 자동차 6대 중 한 대는 시내버스였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부상자들은 이미 병원으로 옮겨진 뒤였다. 경찰과 119구조대 대원들이 끊어져 한강 위에 떠 있는 다리 상판에 올라가 버스 안에서 시신을 수습해 병원으로 이송하고 있었다. 보라색 페인트가 가로 줄무늬로 칠해진 16번 시내버스는 심하게 부서진 상태였다. 구조대원들이 하늘색 담요로 덮어 수습할 때 언뜻 보았던 시신은 파란색 체크무늬 교복을 입고 있었다. 사망자 32명 중에는 학교에 가던 여고생 8명과 여중생 1명이 있었다.

무사안일주의와 적당주의 여전

성수대교 참사 20주년을 맞아 희생자 위령제가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책장에서 먼지가 가득 쌓인 책을 한 권 꺼냈다. ‘성수대교 붕괴사건 원인규명감정단 활동백서’라는 이름으로 당시 서울지방검찰청(현 서울중앙지검)에서 발행한 것이다. 토목·건축, 철강구조 및 교량 분야 전문가 7명으로 구성된 감정단이 다리가 무너진 이유를 찾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지 견해를 밝힌 471쪽짜리 보고서다. 설계도면과 수식·그래프에다가 ‘피로파괴 위험도’ ‘브래킷 구조물 설치’ 같은 전문용어가 가득해 이 분야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결론만큼은 뚜렷하다.

감정단은 보고서의 대부분을 성수대교 붕괴의 기술적인 이유를 찾는 데 할애했다. 하지만 제도, 관행, 규정의 낙후성과 불합리성이 참사의 근본적 이유라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황금만능주의, 무사안일주의, 적당주의가 부실시공의 원인이라는 분석도 빼놓지 않았다. 서울지검장이었던 최영광 검사장은 발간사에 “희생자의 고귀한 생명과 가족의 고통을 승화해 부실공사 시대의 종언을 고하기를 기대한다”고 적었다. 실제로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각종 규정이 정비되고 감리제도가 확 바뀐 것은 사실이다.

‘참사공화국’, 어디서부터 바꿔야 하나

그러나 이 보고서를 만든 사람들의 바람은 아직도 실현되지 못했다. 황금만능주의, 무사안일주의, 적당주의는 여전히 건재하다.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자동차가 씽씽 다니는 2차선 도로를 무단 횡단해야 ‘안전교육장’이라는 성수대교 희생자 위령비를 볼 수 있게 만들었을까. ‘발밑을 조심하라’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건네는 인생의 교훈이 아니라 당장 오늘 실천해야 하는 서바이벌 지침이다. 위령제에 참석한 유가족 대표 김학윤씨가 한 말도 있다. “정부가 20년 동안 안전을 외쳤지만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먼 훗날 보면 대한민국은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안철수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일 때 했던 말이다. 당시에는 비장했지만 지금은 정치인들이 한 여러 이야기 중 하나에 불과하다. ‘국가개조’는 어떤가. 지금 이 말이 화제에 오르면 반응은 이렇다. “언젠가 들었던 것 같은데, 5년 전이었나? 10년 전이었나?” 그러면서 또 기성세대는 자조와 무기력에 빠진다. 우리 아이들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고승욱 온라인뉴스부장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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