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준동] 세종·정조가 존경받는 이유 기사의 사진
짐(朕)이 곧 국가였던 조선시대 왕의 하루는 어땠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이 2011년 펴낸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를 보면 국정 최고책임자인 동시에 한 인간이었던 왕의 일상과 사생활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국왕 앞에는 처리해야 할 사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절대군주였지만 왕은 자유스럽지 못했다. 사관들이 왕의 지근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다. 국왕의 일과는 모두 공개됐다. 정조의 시문집 ‘홍재전서’에 이런 말이 나온다. “옛날 임금들은 외조(外朝)에는 국사(國史)를 두고 내조(內朝)에는 여사(女史)를 두었고, 거동은 좌사(左史)가 쓰고 말은 우사(右史)가 썼는데, 임금은 숨기는 것이 없음을 보이고 모범과 감계(교훈이 될 만한 본보기)를 밝히려는 이유에서였다.”

인사도 공개를 원칙으로 했다. 요즘은 ‘낙하산’이니 ‘○피아’니 말들이 많지만 조선시대에는 ‘분경(奔競)’이란 말이 자주 나온다. 분경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로 벼슬을 얻기 위해 집정자의 집에 분주하게 드나들며 엽관(獵官·관직을 얻으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는 것)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정종은 분경금지법까지 만들었고 태종은 삼군부에 명하여 무신의 집에 분경하는 것을 금하였다. 성종 때 반포된 ‘경국대전’에는 분경을 하는 자는 곤장 100대의 형을 가하여 3000리 밖으로 유배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19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 최한기는 ‘인정(人政)’이란 책에서 “인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뽑을 만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것은 공선(公選)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뽑아서 안 될 사람이라고 하면 그것은 사선(私選)이다. 한두 명을 사선하게 되면 분경의 폐단이 생겨나고 민생을 괴롭게 만든다. 인사로 말미암아 치란(治亂)이 달라지는 것이다”라고 썼다.

소통도 즐겼다. 임금은 정승이나 판서 같은 고위직만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경국대전의 육전 중 하나인 ‘예전(禮典)’에 보면 ‘동반(문관) 6품 이상과 서반(무관) 4품 이상은 각각 관아의 차례에 따라 매일 윤대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지금으로 치면 각 부처의 과장 정도나 그 이하 직급의 실무자들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실무자들과도 매일 만나니 왕은 국정의 모든 현안에 대해 손바닥 보듯 꿰뚫을 수 있었다. 소통의 달인이었던 세종은 언제나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전달하지 않았다. “경의 말이 옳소. 그런 관점으로 바라보았더니 역시 경의 생각이 깊소.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러이러한 경우도 있지 않나 싶소”라는 식이었다. 언제나 겸손하고 투명하게 국정을 이끌었던 왕들이 후세에도 존경을 받고 있는 사실은 불문가지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우리 대통령은 어떤가.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등 지도자의 개인 행적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이 도를 넘고 있다”고 하자 이틀 뒤 검찰이 사이버 공간에서의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 행위를 엄단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는 사이버 망명이라는 웃지 못할 촌극으로 이어졌다.

인사는 또 어떤가. 일부 몇몇 대통령 가신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고 낙하산 인사가 판을 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관피아’의 산하기관 재취업이 주춤하자 그 자리를 청와대와 연줄이 닿은 정치권 인사들이 줄줄이 꿰차고 있다. 전문성이나 자질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조선 왕들이 왜 분경을 금지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의 소통은 일방적이다. 국무회의나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미리 준비한 내용만 전달하고 끝이다. 오죽하면 장관이나 청와대 수석들조차 대통령을 직접 만나기 어렵다는 얘기까지 나오겠는가. 폐쇄적이었던 조선시대에도 왕들은 실무자까지 만나 활발하게 국정을 토론했는데 말이다. 세종처럼 우리 대통령도 민의를 꼼꼼히 살피면서 소통하고 투명한 인사를 중시하는 그런 지도자가 됐으면 한다. 그래야 후세 사람들이 대대로 칭송하지 않겠는가.

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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