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e&deep-슬며시 사라진 경제민주화 구호] ‘일감’ 규제 법만 만들어놓고 공정위 담당 局 신설은 감감 기사의 사진
박근혜 대선 후보의 경제민주화 공약 초안을 마련했던 김종인 가천대 석좌교수는 23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경제민주화는 대통령 선거의 전략이었을 뿐”이라며 “현재 정부는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 반면 노대래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 20일 공정위 국정감사에서 “경제민주화와 경제 활성화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라며 “경제 활성화 때문에 공정위 활동이 위축됐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경제민주화를 놓고 두 사람의 발언은 극과 극이다. 과연 경제민주화는 꽃 한번 피지도 못하고 시든 것일까. 아니면 꽃봉오리를 감춰놓고 때를 기다리는 것일까.

◇조용히 사리진 단어, ‘경제민주화’=2012년 대선 직전 나온 새누리당의 대선 공약집의 첫 번째 장 제목은 경제민주화였다. 정부 출범 이후 나온 ‘박근혜정부 140대 국정과제’에서도 경제민주화는 창조경제 바로 뒤에 자리잡았다. 이후 총수일가 사익편취를 막기 위한 공정거래법이 개정되는 등 경제민주화 입법도 성공적이었다는 평이다. 그러나 올 들어 경제민주화는 경제 활성화라는 대의명분에 뒤로 밀리는 모습이다.다. 총수일가의 ‘일감 몰아주기’ 근절법안이 마련됐지만 공정위에 이를 전담할 국 조직 신설은커녕 과 1개조차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공정위 핵심 국 중 하나인 카르텔 국장은 7월 말 국무조정실로 파견 나간 뒤 3개월째 공석이지만 정부는 이를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 분위기다. 김 교수는 “최고지도자가 확실히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경제민주화는 이뤄질 수 있는 것”이라며 “경제민주화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이 멀어졌는데 공정위 등 정부 조직도 적당히 지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올 들어 경제민주화 국정과제를 독려할 청와대 분위기도 슬며시 바뀌고 있다. 경제민주화란 용어 대신 불법하도급, 공기업 비리가 이를 대체하고 있다. 지난 7월 박 대통령은 불법하도급 실태 조사를 지시했고, 공정위는 9월 긴급 실태 조사에 착수했다. 공기업 방만경영 문제제기와 함께 시작된 공기업 조사 결과는 연내 발표될 예정이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청와대가 의지를 보이지 않는데 경제민주화가 제대로 이행되겠느냐”면서 “정부가 말로는 경제민주화를 외치지만 의지도 인력도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달라진 공정위 의결 성향=그렇다면 경제민주화를 내걸었던 지난 2년간 공정위의 사건 처리는 어땠을까.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김상민 의원이 공정위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3년 1월∼2014년 9월 공정위 전원회의와 소위원회 사건 처리의 큰 변화는 심의절차종료와 재심사결정의 증가다. 심의절차종료는 공정위가 위법성 판단을 하지 않고 사건을 종료하는 것으로 기업 입장에서는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재심사결정은 과징금 부과 등 처벌이 필요한 의견을 제시한 심사관에게 혐의 입증을 다시 하라며 사건을 돌려보내는 것이다. 두 결정 모두 비공개로 국민들은 결과와 결정 이유를 알 길이 없다.

2010∼2012년 매년 10건을 넘지 못했던 심의절차종료 사건은 지난해 26건으로 급증했고, 올해(9월 말 현재)도 7건을 기록 중이다. 전체 심의절차종료 결정 33건 중 공정거래법상 대기업으로 분류되는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소속 기업이 피심인이었던 사건은 6건(18.1%)이다. 이번 국감에서 논란이 된 삼성전자의 컴퓨터 애프터서비스(AS) 중고부품 사용 사건 결정도 심의절차종료였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0월 컴퓨터 유상 AS과정에서 중고 부품을 정품으로 속여 수리했다는 일부 언론 보도 내용을 인정하고 피해를 본 소비자에게 환불해주겠다고 밝혔지만 공정위는 소비자에게 직접 피해가 없었다는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같은 기간 재심사명령은 30건으로 이 중 11건(36.6%)이 대기업 사건이었다. 재심사명령은 위원회가 보다 명확한 법리를 바탕으로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는 측면도 있지만 심사관을 위축시키고 피심인인 기업에 반격의 기회를 주는 반작용도 있다.

김 의원은 “대부분의 대기업이 불공정행위로 처벌받은 전과가 있는데 면죄부 처분이 느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공정위, “본 게임은 내년부터”=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재벌로 불리는 대기업집단의 사익편취와 지배구조 개선이다. 공정위는 관련 경제민주화 입법 이후 이에 대한 감시·감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세간의 지적에 대해 “기다려 달라”는 입장이다. 대기업 계열사 간 부당내부거래 처벌 규정은 지난 2월부터 시행됐지만 기존 거래분에 대한 처벌은 1년간 유예기간을 두고 내년 2월부터 적용된다. 공정위 관계자는 “부당 내부거래 조사를 떠벌리면서 할 수 없지 않느냐”면서 “법만 만들어놓고 손놓고 있지는 않다”고 강조했다.

세종=이성규 윤성민 기자 zhibag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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