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선운산 애기단풍은 시와 노래가 되고 기사의 사진
선운산 단풍 숲길. 고창=구성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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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단풍이 가장 고운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전북 고창군 아산면 선운산 도솔천 단풍나무 숲을 첫손에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설악산 천불동계곡, 가야동계곡, 주전골 등도 아름답고, 오대산 선재길, 지리산 피아골 단풍도 그에 못지않다. 그렇지만 도솔천 양옆으로는 단풍나무가 우선 압도적 우점종이고, 애기단풍이라는 별칭처럼 작고 무성한 잎이 빨간색부터 초록빛까지 다양하고도 선명한 색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200∼300년씩 묵은 단풍고목의 잎이 계곡을 덮은 채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광경은 아무데서나 볼 수 없는 진경(珍景)이다.

지난 9일 오후 늦게부터 10일 오전까지 선운산 단풍 속에 묻혔다. 내가 30년째 1∼2년이 멀다 하고 이곳을 찾는 이유는 언제라도 마음이 푸근해지고, 그러면서도 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동백숲, 장사송, 바위에 붙은 송악 등 천연기념물 세 가지, 새벽의 계곡 운무, 선운사 경내의 300년 묵은 배롱나무 네 그루, 낙조대의 일몰, 천마봉에서 바라보는 마애불과 내원궁, 그리고 도솔천 숲길…. 그러고도 초가을 절정기의 꽃무릇 군락을 아직 보지 못했다.

선운사 천왕문 앞에 섰다. 단풍나무와 느티나무 고목이 많은 곳이다. 전라남북도와 제주도에 분포하는 단풍나무는 중국 동북부와 전국에 분포하는 당단풍나무와 달리 잎의 크기가 작고, 잎의 열편이 5∼7갈래로 갈라져 있다. 당단풍은 잎이 크고, 열편이 9∼11갈래다. 일반적으로 단풍이 당단풍보다 색깔이 더 곱다. 더구나 이곳과 정읍 내장산, 장성 백암산 등에 분포하는 단풍나무 잎은 길이가 보통 단풍의 절반인 3∼4㎝ 이하의 애기단풍이다. 앙증맞게 7갈래로 갈라진 단풍잎이 계곡과 사람들을 물들이면 모든 이들의 표정이 애기단풍처럼 환하고 온화해진다.

천왕문 앞 극락교 주변은 도솔천 계곡에 비치는 반영(反影)이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다. 동행한 문화관광해설사 강복남씨는 “사계절 사진작가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봄에는 애기 손톱 크기로 삐져나오는 단풍 잎눈과 새싹이 물속 햇빛에 반짝이고, 여름에는 하늘을 가린 짙은 녹음이, 가을에는 붉고 노란 단풍이,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와 설경이 물 위에 파스텔화를 그려 넣는다.

선운사 뒤편 숲에는 3000여 그루의 동백나무 군락이 5000여 평에 걸쳐 30m 폭으로 가늘고 긴 띠 모양으로 조성돼 있다. 수백년 전부터 방화림으로 계획된 것이다. 동백나무 숲은 화재 확산을 24분가량 지연시키는 것으로 실험 결과 확인됐다. 반면 소나무는 송진 성분 때문에 산불이 나면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옛날 선운사의 사찰 경제를 크게 지탱했던 것은 동백기름과 동백 열매였고, 주변 민가는 바닷물을 끓여 만드는 소금, 즉 자염을 생산해 생계를 꾸렸다. 선운산과 주변에 소나무가 거의 없고, 단풍나무 느티나무 등 활엽수가 무성한 것은 자염 생산을 위한 연료로 소나무가 일찌감치 벌채됐기 때문일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선운사에서 도솔암까지 3.2㎞의 단풍터널을 통과한다. 다소 쌀쌀해진 아침 바람에 단풍 비가 내린다. 햇빛이 단풍잎을 통과하면서 붉게 물들어 계곡과 탐방객과 사진작가의 볼도 물들인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가 다니는 넓은 길과 좁은 오솔길 가운데 선택할 수 있다. 양쪽 길이 번갈아 그 좌우를 감싸고 뻗은 도솔천 계곡은 2009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54호’로 지정됐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숲길을 선운산 일대 경관의 백미로 일컫는다.

갈림길에서 산속 오솔길로 접어드니 땅이 촉촉이 젖어 있다. 바닷가라서 새벽 5시쯤 낮은 기온에 응결된 습기가 운무로 내려앉은 것이다. 단풍 빛은 넓은 찻길가보다 못하지만 잎이 연둣빛으로 물든 작살나무, 노랗게 물든 생강나무와 고로쇠나무, 그리고 당단풍, 신나무, 붉나무 등 다양한 수종을 볼 수 있다. 강복남 해설사는 “양쪽 길이 지금은 단풍카펫으로 덮여 있지만 초가을, 특히 9월 15∼20일께에는 틀림없이 국내에서 가장 긴 꽃무릇 카펫이 깔린다”고 말했다.

선운사의 동백과 단풍, 그리고 꽃무릇은 너무도 많은 시와 노래의 소재가 됐다. 김용택, 도종환, 최영미, 안도현 등 비교적 인기 있는 시인들이 이들 소재를 담은 시나 산문을 썼다. 그렇지만 이 계절에는 이 고장 시인 서정주의 ‘푸르른 날’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전문)

도솔천변의 단풍나무 숲이 언제 어떤 이유로 조성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정유재란 이후 이 숲이 전란과 일제강점기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단풍나무가 당시 목재로서는 쓸모가 적었던 덕분이라고 본다. 지난 9일 선운사의 하루 입장료 수입만 5000만원, 주차료 수입이 1200만원이었다고 하니 장자가 말한 ‘무용(無用)의 용(用)’이 생각난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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