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완충지대가 필요하다 4] 환경 이기는 ‘단단한 아이’… 교육이 만든다 기사의 사진
각국의 전통 복장을 입은 충남 서산시 차동초등학교 학생들이 20일 외국인 교사가 강의하는 ‘다문화 이해’ 수업을 듣고 있다. 차동초는 전체 학생 110명 중 다문화가정 학생이 36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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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청소년이 놓인 외부 환경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아이들을 데려와 위(Wee)스쿨 같은 데서 치유해도 복귀하면 예전 모습이 되곤 한다. 일상에 드리운 학대·방임·빈곤 등의 그림자는 잘 지워지지 않는다. 붕괴된 가정, 성적만 우대하는 학교 풍토를 뜯어고치기 어렵다면 아이들을 더 단단해지도록, 그래서 스스로 그림자를 벗어버리게 만들어줘야 한다. 고무공처럼 역경을 튕겨내고 꿋꿋하게 나아갈 수 있는 '마음의 탄력성'을 길러주는 게 교육의 역할이다.

방치된 형제, 사람 온기 찾아 게임으로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 민혁(가명·13) 민주(가명·11) 형제. 충남 서산의 허름한 집에서 아버지와 셋이 살고 있다. 필리핀 국적의 어머니와 아빠는 민혁이가 네 살 때 이혼했다. 알코올 중독자 남편이 휘두르는 폭력을 견디지 못했다. 아버지는 공사 현장을 전전하며 하루 벌어 하루 산다. 일감이 없는 날은 술에 취해 형제를 때렸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때려도 울지 않았다. 울면 시끄럽다고 또 맞았기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만취한 아버지는 때리다 지치면 그 자리에서 잠들곤 했다. 형제는 아버지가 잠든 걸 확인한 뒤에야 울었다. 그들의 일상은 아버지가 집에서 나가길 바라며 숨죽이고 기다리는 일의 반복이었다.

차츰 형제는 게임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세상과 단절돼 갔다. 학교 친구들도 형제를 멀리했다. 말수가 적고 어두운 구석이 있다며 상대해주지 않았다. 허름한 옷에서 나는 냄새도 ‘보이지 않는 벽’이 됐다.

민혁이가 좋아하는 건 ‘써든 어택(Sudden Attack)’이라는 게임이었다. 칼로 적군을 찔러 죽일 때 만족감이 더 컸다고 한다. 민주는 ‘아이온’이란 게임을 즐겼다. 하루 종일 몰두하다 보니 온라인 게임 이용자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자신만의 모임을 만들고 대장이 됐다. 모임 구성원들은 민주의 말을 따랐다.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사람의 온기를 게임이 채워줬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세상으로 나온 아이들

다문화 특성화 학교인 차동초등학교 교사들은 다문화 학생들을 모집하던 중 민혁·민주 집을 찾았다. 김선희(47·여) 교감은 당시 형제의 상태를 보고 경악했다. 냉장고엔 소주만 10병 덩그러니 놓여있고, 방바닥에는 빈 소주병이 널브러져 있었다. 싱크대는 한 달 넘게 설거지하지 않은 그릇이 넘쳤다. 변기는 물이 내려가지도 않았다. 김치에는 구더기가 끓었다. 교사들은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아이들을 돌볼 능력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대안이 없어 데리고 있을 뿐이었다.

차동초로 전학한 형제는 아이들과 섞이지 못했다. 현실세계에서 친구를 둔 적이 없어서다. 교사들은 차분히 마음을 열어갔다. 일반 가정 3명, 다문화가정 3명을 묶어 하나의 모임으로 만들었다. 소꿉놀이, 그림 그리기 등 함께하는 시간을 늘렸다. 일반 가정과 연계해 돌봄을 받는 시간도 늘리고, 교사들과 형제를 1대 1로 묶어 매일 아침밥을 차려줬다. 학교에서 친구, 교사, 다른 가정의 부모들에게 둘러싸여 형제의 삶은 안정돼 갔다.

아버지는 사람들 눈 때문에 폭력을 자제하려 했지만 술에 취하면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형제들은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교사나 친구 집으로 피신하며 꿋꿋하게 지냈다. 생활이 안정되자 꿈이 생겼다. 꿈이 생기자 견디기 수월해졌다.

어느새 아이들은 의젓해졌다. 친구들이 “엄마 없는 애”라고 놀릴 때면 주먹질을 하기도 했지만 먼저 다가가 사과하는 경우가 많다. 놀린다는 건 최소한 자신들에게 관심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나둘 친구가 늘어갔다.

민혁이는 혼자 있을 때 비행기를 자주 그린다. 파일럿이 된 뒤 어머니를 만나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 “파일럿이 꿈입니다. 미국에 있는 엄마한테 가려고요.” 목표가 생긴 민혁이는 PC방이 아닌 도서관에 간다. “제 꿈은 도서관에 있으니까요.”

민주도 형의 영향을 받아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요리에 호기심이 많다. “형이랑 엄마, 아빠한테 매일 요리해드리고 싶어요. 밥 먹을 때만큼은 활짝 웃게 되니까.”



아이들의 이상한 방어 기제

아이들은 저마다 외부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어 수단이 있다. 마음의 탄력성을 갖춘 아이들은 웬만한 스트레스에는 의연하게 대처하고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특히 꿈이 있는 아이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렇지 못하면 게임 등으로 현실을 회피하거나 비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윤지(가명·16·여)의 탈출구는 짙은 화장과 문신이었다.

경기도의 한 대안학교에서 위탁교육을 받는 윤지의 허벅지에는 문신이 가득하다. 윤지가 즐겨 입는 핫팬츠 아래로 장미 등이 보인다. 얼굴엔 짙은 화장을 한다. 요새 아이들이 말하는 ‘화장 벽’이다.

윤지는 대기업에 다니는 아버지와 딸을 지극히 사랑하는 어머니를 둔 예쁘장한 소녀였다. 이런 가정에서 극한에 가까운 공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유치원 때부터 ‘월화수목금금금’ 사교육에 내몰렸다. 국내 최고 대학을 나와 굴지의 기업에 다니는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딸이어야 했다. 이런 압박감을 주는 쪽은 어머니였다.

결국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탈이 났다. 부유해 보이는 윤지에게 불량 친구들이 접근했다. 이내 이들과 어울리며 화장을 시작했고 통제불능이 됐다. 부모가 다그치면 억눌렸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어머니와의 갈등이 절정에 달한 중2 때 가출한 뒤 문신을 하고 집에 들어갔다. 격분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용돈을 끊는다고 하자 원조교제를 언급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직접 나섰지만 허사였다. 아버지는 폭력을 써도 듣지 않자 그냥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대신 아이를 몰아붙였던 어머니에게 분노가 향했다. 상담교사는 윤지가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번아웃(burnout)’ 상태라고 했다. 어머니는 아이가 더욱 비뚤어질까 전전긍긍하며 학교만 졸업하길 바라고 있다.

상담교사는 “현재로선 어떤 상담도 무용지물”이라며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아이들에게 외부 스트레스 환경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국어·영어·수학 지식보다 훨씬 중요한데도…”라고 했다.

서산=글·사진 임지훈 기자 zeitgeis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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