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박성래] 109년 전 11월은 참담했다 기사의 사진
이달 중순 중국 미얀마 호주 등에서 몇 가지 다자 정상회의가 열렸고, 박근혜 대통령도 눈에 띄었다. 실로 격세지감이 있다. 바로 1세기 전 11월은 우리 외교사의 최악인 을사조약을 강요당했던 달이었으니 말이다.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는 무력시위 속에 이완용 등 5대신(乙巳五賊) 만을 모아 ‘한일협상조약’이란 것을 강제 체결했다. 11월 17일의 이 조약은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겼다. 사흘 뒤 ‘황성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사설로 망국을 곡했고, 필자 장지연(1864∼1921)은 체포되고 신문은 정간당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이준 이상설 이위종)를 보내 을사조약의 무효를 알리려다 실패한 고종은 강제 퇴위됐다.

109년 전 11월은 이리도 잔인했다. 그런데 이 늑약(勒約, 강압에 의한 조약) 두 달 전 미국의 공주 앨리스가 서울에 도착하여 고종황제와 그 아들 황태자(뒤의 순종)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일이 있다. 미국에 무슨 ‘공주’냐 하겠지만, 당시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큰딸 앨리스는 공주 대접을 받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고, 못되기로도 유명했다. 9월 19일 서울에 도착한 앨리스에게 고종과 그의 신하들이 극진했음은 당연했다. 미국만 잡으면 나라의 독립이 보장될 줄 알았으니. 22일 오찬에는 황제가 친히 공주의 손을 잡아 자신의 식탁에 안내했고, 다음날에는 홍릉(지금의 영휘원)에서 가든파티도 열어주었다.

새로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루스벨트는 나라와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이었다. 대규모 사절단을 동아시아에 파견한 것은 그런 노력의 한 가닥이었다. 7월 8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사절단에는 국방장관 태프트와 20살짜리 딸 앨리스, 그리고 상원과 하원 의원, 육군 대장과 해군 제독 등 고위층이 즐비했다.

하지만 고종이나 그 신하들이 전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두 달 전인 7월 말 앨리스와 동행한 미국 국방장관 태프트와 일본 수상 가쓰라가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일본이 필리핀에서의 미국 이권을 존중하는 대신 미국은 조선에서의 일본의 지위를 존중하겠다는 비밀 약속은 1924년까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미 조선의 운명은 결정된 후였다. 고종의 안타까운 노력은 그저 헛발질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강제 조약 11일 뒤인 11월 28일 미국은 아예 서울 주재 공사관을 폐쇄했다. 실로 잔인한 109년 전의 11월이었다.

당시 미국 부영사 윌러드 스트레이트(1880∼1918)는 앨리스가 서울에 있는 동안 ‘약탈당하는 나라의 앨리스(Alice in Plunderland)’라는 풍자시를 썼다고 한다. 루이스 캐럴의 장편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를 패러디한 것을 그가 앨리스에게 주었다는데, 그 그림과 글 내용은 지금 알 길이 없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 이어 일본까지 합세하고 경쟁하며, 중국이란 참외를 나눠먹자고 바쁘던 시절이었다. 그 강대국들의 신문 잡지에는 참외 모양으로 그린 중국 지도 위에 구체적인 각국의 점령지역이 그려져 나오고 있었다. 중국이 그런 형편이었으니, 조선이야 말해 무엇 할까? 틀림없이 이미 ‘약탈당하는 나라’였다.

스트레이트는 38살로 파리에서 사망했지만, 그가 모교 코넬대에 남긴 사진 등은 앨리스의 서울 구경을 증언해 준다. 미국에 돌아가자 두어 달 뒤 백악관에서 서울에 동행했던 하원의원과 결혼한 앨리스는 96세까지 살며 ‘워싱턴의 권력 브로커’란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또 루스벨트는 러일전쟁의 강화조약을 주선했다는 이유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조선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그 밀약의 주인공 태프트는 루스벨트에 이어 미국의 27대 대통령(재임기간 1909∼1913)이 되었으니 그들에게는 행복한 결말이었을 것이다.

설마 109년 전 11월의 참담한 사태가 다시 찾아 올 리는 없겠지만, 오늘날에도 외교는 정말로 조심, 또 조심해야겠다. 시일야방성경고(是日也放聲警告)!

박성래 한국외대 과학사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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