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이 通하게 하라] 사소한 질서도 지키는 ‘시민의 힘’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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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9일 밤 미국 워싱턴DC와 볼티모어 지역을 폭풍 '드레초'가 강타했다. 직선으로 넓고 빠르게 이동한 드레초는 최고 풍속이 96∼128㎞에 달했다. 천둥과 번개, 폭우도 동반했다.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주에서는 고목들이 쓰러지면서 전깃줄을 끊어 수만 가구가 정전됐다. 수돗물도 나오지 않았다. 교통신호등도 작동하지 않았다. 1주일이 넘어도 복구되지 않는 가구가 적지 않았다. 기자는 "미국이 이렇게 허술할 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신호등이 꺼졌지만 한갓진 길은 물론 왕복 4차선 대로에서도 큰 지장 없이 교통이 원활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 비결은 각각 다른 방향의 차량이 만나는 교차로에서 1초라도 먼저 도착한 차량이 먼저 움직인다는 '원칙'이었다.

한국에서 외교관으로도 근무한 데니스 핼핀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연구원은 “이것은 법 이전에 미국의 관습”이라면서 “먼저 와서 오래 기다린 사람이 먼저 가야 한다는 것은 미국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공정(fairness)’의 원칙에 맞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교통신호등이 꺼졌는데도 질서가 지켜지는 것은 관련 규정을 교육받기 때문이냐는 질문에 “일부 주(州)의 운전자 수칙에 관련 규정이 있을 것 같다”면서도 “관공서나 은행 등에서 제일 앞사람(오래 기다린 사람)이 먼저 서비스를 받는 것과 같은 원칙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미국에 체류하는 한국인들이 가장 경각심을 갖는 것 중 하나가 교통법규다. 고속도로나 지방도로, 주택가 등 어느 곳에서든 교통표지판을 허투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다. 주변에 보행자나 차량이 없는 주택가 소로에서도 대부분 운전자들이 ‘일단 멈춤’ 표지판이 있으면 3초간 정지한 뒤 출발한다. 한국인들은 ‘사람도 차량도 분명히 없는데 이럴 필요가 있을까’ 여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정해진 법규는 지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다.

이것은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법규라도 강제력이 뒷받침되고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 이웃에 사는 미국인 할머니는 지난해 밤 10시가 넘어 가로등도 없는 주택가를 운전하다 ‘일단 멈춤’ 표시를 그냥 지나쳤다고 경찰에 단속됐다. ‘함정 단속’이라고 항의했지만 결국 100달러(약 11만원) 이상의 벌금을 물었다.

교통규칙 위반이니 벌금 정도로 때우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벌점이 쌓이거나 위반 정도가 심하면 수십 시간의 교통법규 관련 교육에 참여하거나 정식 재판을 받아야 한다.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거주하는 교민 이민형(47)씨는 “이민 초기 고속도로에서 차로 변경을 하면서 방향지시등을 작동하지 않았다고 뒤따라온 경찰이 200달러 가까운 벌금을 물린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 이민자 상당수가 교통 딱지를 떼이면서 미국에서 법 무서운 줄 알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운전자 수칙 등 많은 법규가 있다. 하지만 시민들이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반면, 미국에서는 일단 법규가 생기면 지켜진다고 믿는다. 어길 경우 각종 제재가 따르는 것이다.

미국이 ‘자유의 나라’라는 것은 피상적인 인상일 뿐이라고 얘기하는 교민들도 적지 않다. 기자는 지난해 집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나뭇가지가 바깥의 보행자도로 쪽으로 뻗었다며 가지치기를 해 달라는 카운티 정부의 경고장을 받은 바 있다. 언제 촬영을 했는지 울타리 나무들이 보도를 침범한 상황이 담긴 사진까지 첨부돼 있었다.

단순히 가지치기 정도로는 안 되고 여러 그루의 잡목을 뽑아내야 한다고 판단돼 집주인에게 연락했다. 집주인은 경고장을 팩스로 보내 달라고 한 뒤 별말 없이 수백 달러를 들여 조경업체를 고용, 나무를 잘라냈다.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경우에는 공권력이 강력히 작동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공권력과 강제성만으로 미국에서 원칙과 법질서가 서는 것은 분명 아니다. 미국의 공립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다 보면 책 상태가 너무 깨끗한 데 놀라게 된다. 낙서가 돼 있거나 책장이 찢겨나가는 등 훼손된 것을 본 적이 없다. 대출이 많이 이뤄진 책이고 책 모서리가 접힌 자국이 있는 것 등으로 봐 여러 사람이 읽은 것은 틀림없지만 연필 자국도 없다. 시민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경우 도서관 이용자들이 줄을 긋거나 중요한 부분을 찢어가는 등 책을 함부로 사용해 버려지는 책이 한 해에 수십만권에 이른다.

미 국방연구소(IDA) 책임연구원인 오공단 박사는 “미국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정직과 공동체 의식”이라며 “‘공공의 물건’인 도서관 책을 사유물처럼 사용하는 것은 정직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미국인들은 여긴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가정과 학교에서 이러한 가치가 교육되고 전승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기업과 정부 등 각종 조직에서 프라이버시에 대한 존중과, 규칙에 의거한 의사결정 시스템은 한국이 배워야 할 덕목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미국도 세계화로 인한 경쟁 심화로 퇴색한 점이 있지만 개인의 직장 근로시간 이외의 시간에 대해 회사나 상사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게 ‘기준’이다.

황민 조지워싱턴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 사회를 볼 때 가장 인상 깊은 게 ‘절차의 합법성과 투명성’을 중시한다는 것”이라며 “대학만 해도 의사결정 때 근거가 되는 두꺼운 규정집이 있다. 학과 회의를 할 때도 이 규정집을 들고 들어오는 교수가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럽 문명 중에서도 영국계(앵글로색슨) 전통에서 두드러진 합리성과 절차를 중시하는 미국 사회의 강점이 퇴색하고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역사의 종말’의 저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포린어페어스 9·10월호에서 미국의 제도와 정치가 쇠퇴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저명한 경제사학자인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도 지난해 펴낸 ‘위대한 퇴보’에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법치주의 등 서양의 발전을 이끌어 온 기둥들이 허물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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