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이 通하게 하라] 나눠먹고 떠넘기고 짬짜미까지… 反시장 일상화 기사의 사진
‘원칙의 실종’은 국내 경제계 전반의 고질병이 됐다. 법과 매뉴얼은 있지만 오랫동안 이어져 온 관습에 의존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이익을 취해 왔다. 건설사들은 든든한 담합 고리로 무장한 채 그들만의 국가재정 나눠 먹기를 일삼아 왔다. TV 홈쇼핑이나 대형 유통업체들은 본인들이 부담해야 할 비용을 ‘을’에게 떠넘기며 이익을 가로챈다. 한정된 파이를 쟁탈하기 위한 이동통신 3사의 이전투구는 IT 산업을 갉아먹어 글로벌 경쟁을 해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눠먹기’의 일상화=공공입찰은 정부나 공공단체가 물품을 매매하거나 도급계약을 할 때 가장 적당한 대상자를 공개적으로 고르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 건설사들은 ‘적당한 대상자’라는 개념을 다르게 해석했다. 시공 능력이나 가격으로 경쟁하는 대신 순서대로 나눠 먹었다. 대형사는 사다리타기와 동전 뽑기로 입찰 순서를 정했다. 4대강 사업부터 고속철도, 가스관까지 가리지 않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올 들어 9월까지 부과한 과징금 1조396억원 중 무려 8218억원(79.4%)이 건설사 몫이었다. 담합 처벌 가능 행위가 공정위 조사 개시일로부터 5년 전까지란 규정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자칫 올 한 해 국내 모든 건설사가 망했을 것이라는 자조 섞인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올해 과징금 부과 상위 5개사는 모두 대형 건설사들이었다. 현대 대림 SK GS 대우건설에서 사이좋게 6건의 담합이 적발됐고, 많게는 976억원(현대건설)에서 적게는 348억원(대우건설)까지 수백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중소형 건설사는 이들 대형 건설사가 낙찰받을 수 있도록 들러리 입찰자로 참여했다. 물론 들러리를 서준 업체에는 골프장 회원권을 사주는 등 확실한 금전적 보상이 있었다. 공정위 관계자는 9일 “담합으로 과징금을 부과받은 건설사들은 공정위에 ‘분할납부’ 신청을 하면서 모든 혐의를 인정한다고 밝히는 동시에 법원에는 억울하다며 소송을 내고 있다”며 “이들엔 아직도 담합이 원칙으로 작용하는 듯하다”고 꼬집었다.

◇사라진 매뉴얼=매뉴얼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대표적인 게 유통업계다.

현행법은 납품업체가 판촉비용의 50% 이상을 분담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홈쇼핑 회사는 판촉비용의 최대 90%까지 납품업체에 떠넘겼다. 납품업체가 홈쇼핑 회사에 내는 송출 수수료도 상식을 벗어난다. 통상 홈쇼핑 회사는 납품업체가 판매한 금액의 43%를 떼어간다. 롯데그룹 계열사인 롯데홈쇼핑의 전·현직 임원과 전직 상품기획자(MD) 등이 재직 시절 납품업체로부터 거액의 뒷돈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사례는 이런 무원칙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깊숙이 박혀 있는지 보여준다.

불공정거래 관행은 대형 프랜차이즈 업계도 피해가질 않는다. 대부분 가맹본부는 가맹점 인테리어 공사를 본사에서 지정한 인테리어 업체에서 하도록 강요한다. 가맹점이 개별적으로 인테리어 업체를 선정하려 하면 감리비 명목으로 본부에 돈을 내야 한다. 감리비는 최소 300만원에서 최대 2000만원까지 천차만별이다. 가맹점 재시공을 강요하거나 마케팅·홍보비를 가맹점에 전가하는 식으로 횡포를 부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보이지 않는 카르텔=원칙이 사라진 곳엔 어김없이 탈법과 담합이 파고들었다. 이동통신 시장이 그렇다.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3개 사는 이동통신 시장에서 경쟁사의 고객을 빼앗기 위해 원칙을 내려놓았다. SK텔레콤은 전체 시장의 50%, KT는 30%, LG유플러스는 20% 점유율을 유지하거나 타사의 점유율을 무너뜨리려고 고객들의 개인정보를 확보해 무차별 광고 전화를 돌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통신 3사가 확보한 개인정보가 합법적으로 취합된 것만은 아니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치열하게 경쟁하는 듯하지만 이들 3사 사이엔 보이지 않는 카르텔도 존재한다. 이동통신 시장이 사실상 3개사 경쟁으로 고착화되면서 이들은 요금 수준을 정할 때 항상 타사의 눈치를 본다. 요금 담합 의혹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특히 통신요금 인가제가 요금 담합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인가제도는 1996년 후발 사업자 보호를 위해 도입됐다. 가입자가 많은 선발 사업자가 요금을 마음대로 결정해 시장을 독점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이통 3사의 요금제가 비슷비슷해 오히려 통신요금 할인을 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가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단통법)을 도입해 단말기 보조금 액수를 공시하도록 한 것도 결과적으로 통신사 담합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담합을 묵인하고 시장 경쟁을 가로막는 단통법으로 소비자 판매점 제조사 모두 피해를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원칙 오락가락 정부도 문제=국내 업계 전반에 이 같은 무원칙이 횡행하는 것은 한정된 파이를 일부가 나눠먹겠다는 인식이 만연돼 있기 때문이다. 경쟁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것이다. 홍명수 명지대 법대 교수는 “우리 사회는 경쟁 모델에 친숙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약자에 대한 배려는 사라지고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모습만 남았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공정경쟁이라는 원칙을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4대강 사업 입찰 담합으로 과징금 폭탄을 맞은 건설사들이 그에 앞서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 등 각종 상훈을 받은 사례는 이 같은 지적을 뒷받침한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새정치민주연합 강동원 의원이 국토교통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09년 이후 4대강 사업에 협조한 이유로 훈장, 포장 등 각종 상훈을 받은 1152명 중 담합에 적발돼 처벌받은 건설사에 소속된 이는 131명이나 됐다.

경제개혁연구소 위평량 연구위원은 “담합에 대한 행정적 제재와 형사처벌이 담합으로 인한 기대이익보다 크지 않기 때문에 담합이 반복되고 있다”면서 “소비자 집단소송제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담합=패가망신’이라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세종=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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