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김일수] 인권은 저급한 데로 흘러도 좋은가 기사의 사진
어김없이 올해에도 인권의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는 계절이 왔다. 지금 국민적 관심은 온통 청와대 기밀문서들의 유출과 그 속에 담긴 비선조직의 국정농단 의혹에 쏠려 있지만 말이다. 인류보편의 인권사상은 서구에서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새로운 인간질서 확립을 위한 치열한 정신적 투쟁의 도구였다. 17세기 영국 인권투쟁에서 물꼬를 트고, 1776년 미국 독립선언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던 인권운동은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에서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지평을 확립했다.

오늘날 이 전통적인 인권의 가치목록들은 변용에 변용을 거듭해 온 것이 사실이며, 그 변용은 폭발적이어서 도처에서 인권 갈등의 유발 원인이 되고 있다. 자유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소극적인 그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적극적인 그 무엇에로의 자유, 단순한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사생활의 자유, 정보의 자유가 아니라 정보의 바다에서 잊혀질 자유, 더 많은 자유가 아니라 더 많은 안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가는 실정이다.

그와 함께 인권도 복잡한 양상을 드러낸다. 인간 가족 모두를 아우르던 인권의 보편적인 빛이 소수자의 인권을 더욱 짙은 그림자 속에 빠트렸다는 인식 하에 소수자의 인권을 클로즈업시켜 인권정책의 우선과제로 삼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범죄 피해자의 인권, 아동의 인권, 노인의 인권, 장애인의 인권, 비정규직 근로자의 인권, 성소수자의 인권은 비교적 최근 들어 자주 쟁점이 되는 주제들이다. 국제사회에서도 현안이 되고 있는 북한 인권, 탈북자들의 인권, 정치적 망명 등도 우리 삶의 현주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문제들이 아니다.

1999년 코소보전쟁과 유럽연합군의 코소보진압작전은 인권 역사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648년 체결된 웨스트팔리아조약에 의해 수세기 동안 국제평화의 지렛대 역할을 해온 국가주권 우위의 사고가 인권 우위의 사고에 압도당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질서 가운데 인권보다 우선하는 어떤 원칙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 사건이었다. 1975년 유럽안보회의에서 채택된 헬싱키선언은 인권문제를 국제정치의 중심테마로 끌어올렸고, 또한 동서대화의 중심테마로 만들었다. 이것이 새로운 유럽질서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었고, 그 후 코소보사태의 개입 명분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근대적 인권문헌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생래적 권리로서의 인권에 관한 사상이다. 이 사상의 근저에는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동등하게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인권이 각 사람의 생래적 권리라면 공동체 내에서 인권갈등을 해결할 기관이나 인권의 제약을 가능하게 해줄 준거점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가 문제이다. 자연권으로서의 인권사상도 이와 비슷한 흐름이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자연은 신적 연관성에서 떨어져 나왔다. 자연의 자기법칙성과 독자성이 부각되면서 자연은 마치 시계처럼 돌아가는 어떤 것으로 이해되었다. 오늘날 인권을 표방하면서 광기에 찬 자기주장을 막무가내로 해대는 극단적 소수의 목소리들은 실은 후기 현대적 조류이기보다 이미 근대의 자연사상에서 배태된 것이다.

지금 지구촌은 대림절기를 지내고 있다. 인권이라는 주제도 이제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대속의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에 비추어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나서야 할 때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인권은 혁명의 돌격나팔이나 기계적인 율법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반면, 인권규범과 인권의식이 없는 하나님 신앙은 사회적 지평을 잃어버린 채 골방 속에 갇혀버린 사사로운 취향 아니면 종교적 열광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소수자의 인권소란에 대한 주류사회의 관용과 열린 대화의 필요성도 이런 맥락에서 곱씹어 볼 일이다. 적극적인 해소 없이 소극적인 무관심과 묵살에 머문다면 인권을 점점 저급한 늪에 빠트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마갈릿의 저작 제목처럼 ‘품위 있는 사회’를 열기 위해서라면 더욱 그러하다.

김일수 고려대 명예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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