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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민주주의의 후퇴… 불안전한 세상… 음모론은 매혹적이다

음모론의 시대/전상진/문학과지성사

[책과 길] 민주주의의 후퇴… 불안전한 세상…  음모론은 매혹적이다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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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회라는 인물의 국정 농단 이야기를 담은 '찌라시' 하나가 나라를 흔들고 있다. 대통령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다. 2008년 광우병 파동을 떠올려보자. 당시 이명박정부는 광우병 문제를 '괴담'이라고 했다.

언제부턴가 정부와 언론을 믿지 못 하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점점 더 많은 일들이 의심의 대상이 됐다. 그때마다 정부는 음모론이라며 의혹을 차단했으며 나중에 진실로 밝혀지는 경우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음모론은 더 확산됐다.

전상진(51·사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음모론을 이 시대의 두드러진 증세이자 현대 한국인들에게 익숙해진 세계관으로 인정하고, 사회학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음모론을 주제로 삼아 연구해 왔다. 그 결과를 담아낸 책이 '음모론의 시대'다.

저자는 광신자, 멍청이, 정신병자 등의 용어로 논의되던 음모론을 세계를 읽고 해석하는 하나의 도구로 복권시키고, 현대인에게 적합한 세계 관찰의 방법, 혹은 비판이론이나 대항지식으로서의 가능성을 검토한다.

“사람들은 질문한다. 왜 음모론을 믿는가? 내가 보기엔 안 믿을 도리가 없다. 그들에게 되물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음모론에 매혹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이란 몇 가지 현대적 조건을 말한다. “세상은 불확실해지고 불안정해지고 불안전해졌다.” 또 “책임을 위기에 몰아넣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역사의 주역’들 앞에서, 그래서 더 넓어지고 깊어진 간극 앞에서 서민들은 자신의 고통과 원한을 곱씹으며 음모론 따위나 뒤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론장은 텅 비었다. 비판의 과제는 쌓이고 도구는 녹슬었다. 음모론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른 방도가 탐탁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저자는 음모론을 종교나 정치와 비교한다. 음모론이 현대인의 핵심 문제인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에 대해, 거기서 발생하는 고통에 대해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종교와 정치가 담당해온 일이었다. “종교와 정치의 설득력이 약화되면서 발생한 설명의 빈자리를 다른 세속적 신정론이 탐하기 시작했다. 바로 음모론이다.” 물론 “종교나 정치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음모론은 고통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 다만 그것의 까닭을 알려주어, 고통에서 비롯한 감정적이며 도덕적인 곤경에서-비록 상상적일망정-빠져나올 수 있도록 돕는다.” 이로부터 “음모론은 ‘세속화된 신정론’이다”라는 이 책의 핵심 주장이 나온다.

저자는 음모론에 대한 서구 사회학계의 선행 연구와 최신 흐름을 빽빽하게 인용하며 개념을 빚어나간다. 막스 베버는 물론 지그문트 바우만, 움베르토 에코, 라인하르트 코젤렉 등이 불려나온다. 음모론을 다룬 책이 갖는 위험, 즉 특이하고 사소한 이야기로 취급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잘 피해 나간다.

시집보다 약간 두꺼운 240페이지에 불과한 이 책은 민감하고 밀도가 높으며 또 유려하다. 현대와 정치, 여론 등과 관련한 흥미로운 논점들을 건드린다. 음모론 자체보다 음모론 낙인찍기가 더 위험하다는 지적이나 음모론이 종종 지배 도구로 쓰이는 현대 정치의 실상을 드러낸 부분은 특히 예리하다. 저자는 “어떤 요구를 거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반박하지 않고 비정상적인 것의 영역으로 몰아가는 것이다”라는 뤽 볼탄스키의 말을 인용하면서 “폭로와 고발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저항적 음모론은 ‘반박’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으로 낙인찍혀 ‘미친 것, 변태적인 것, 아니면 편집증적인 것’으로 내몰린다”고 말했다.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순응적 반란’ 개념을 끌어와 나치 치하의 유대인 혐오자들, 일본의 재특회, 유럽과 미국의 인종주의자들, 한국의 일베 등의 기괴한 심리를 설명한 부분도 눈길을 끈다. “현 상황에 만족할 수 없으니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 반란이라도 일으키자. 그런데 자신보다 힘센 자들을 공격하려니 무섭다. 자신보다 약한 자들, 곧 만만한 희생양이 필요하다.”

음모론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러나 전복적인 힘을 보여주진 못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음모론이 패러디와 조롱, 웃음거리 등 재미로 소비되고 있으며, 정치 현실을 냉소적으로 포기하게 만들 확률도 높다는 것이다.

이 모험적인 저작은 2014년 발간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가 분명하다. 음모론 시대에 대한 훌륭한 해설서일 뿐만 아니라 우파의 정치가 왜 이토록 성공적인지, 가난한 이들이 왜 부자에 투표하는지, 일베의 심리가 무엇인지 등 근래 우리 정치와 사회, 문화에 나타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현상들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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