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흰 눈 속에 반짝이는 초록빛 조엽수림 기사의 사진
제주시 조천읍 사려니숲. 제주=구성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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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휴식, 의례적인 세미나 등 이런 저런 목적으로 제주도를 자주 가는 편이지만 등산을 좋아하는데도 한라산 정상이나 정상 부근까지 갔던 적은 서너 번에 한 번꼴에 불과하다. 대부분 1박2일의 짧은 일정 탓이고, 궂은 날씨가 훼방을 놓은 경우도 많았다. 반면 가장 자주 간 곳은 비자림이다. 근년에는 취재 목적으로 제주도를 몇 차례 다니면서 제주시 조천읍 사려니 숲길과 여러 오름들도 자주 찾는다.

지난 3일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의 안내를 받아 사려니 숲길을 남쪽으로부터 걸었다. 전날 내린 눈이 삼나무에 무거운 옷을 입혔지만 영상 5∼6도의 날씨와 간간이 비치는 햇살에 급속히 녹아내린다. 호젓한 탐방로 위로 눈 녹은 물이 비처럼 내린다. 사려니 숲길의 백미 중 하나인 ‘삼나무 숲에 내리는 눈’을 봤으니 이런 호사가 없다.

사려니 숲길은 국유림 안에 난대림연구소가 조성한 한남시험림과 그 주변 임도를 걷기 편하게 만들어 2009년부터 일부를 개방한 것이다. 항상 개방돼 있는 북쪽 비자림로(1112번 지방도)의 입구나 동쪽 붉은오름이 있는 남조로(1118번)의 입구에서 걷기 시작해 출입이 통제된 곳에서 되돌아 나오거나 서로 다른 쪽 입구(출구)로 나가게 돼 있다. 반면 남쪽에서 올라가는 길과 입구 근처의 사려니오름은 5월의 걷기 행사기간(15일부터 보름간)에만 무제한 개방된다. 이후 6월부터 10월까지 100명에 한해 탐방 이틀 전까지 인터넷 예약을 받는다.

탐방로 옆으로 눈높이에 참식나무의 붉은 열매가 보인다. 더 낮은 곳에는 사랑의 열매로 애용되는 백량금의 붉은 열매도 눈에 띈다. 작살나무와 새비나무는 보라색 열매를 달고 있다. 동행한 숲해설가 박항순씨는 “참식나무는 노란색 꽃과 파란색 타원형 열매가 10월에 동시에 나타난다”고 말했다. 길가에 심어 둔 황칠나무에 흰색 플라스틱 커버가 씌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박씨는 “노루가 나무 줄기에 뿔을 가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수피가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붉가시나무 군락을 지나 갈림길에서 삼나무 전시림 쪽으로 향했다. 생달나무, 센달나무, 흰새덕이 등 녹과무과 상록활엽수들이 보였다. 길이 평탄하지만 해발고도가 조금씩 높아지자 탐방로 위에도 쌓인 눈이 점점 더 깊어졌다. 이따금씩 노루 발자국이 찍혀 있다. 일제 강점기에 해발 450m 평지에 조성한 삼나무 전시림에는 90년생 삼나무 1850그루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높이 30m, 밑둥치 지름 1m가 넘는 개체가 수두룩하다. 고개를 들어 나무 끝을 보기가 힘겹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사려니오름을 올랐다. 나무계단이 지겹지 않을 정도로 주변에는 동백나무, 후박나무, 팽나무, 사스레피나무, 박쥐나무, 합다리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나타났다. 그늘이어서 동백꽃이 잘 피지는 않지만 이따금 흰 눈 속에 붉은 꽃잎이 선연하다. 제주도는 조엽(照葉)수림대에 속한다. 동백나무 등 차나무과와 참식나무 등 녹나무과 나무들은 잎 표면을 두꺼운 큐티클층이 덮고 있어서 반짝반짝 빛이 나므로 조엽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조엽수림대는 제주도와 남해안의 좁은 해안지대, 일본 남부, 그리고 중국 남부로부터 히말라야에 이르는 지대에만 분포한다.

해발 523m인 정상에 도착하니 주변에 바다가 보인다. 풍경을 안내판과 맞춰 보니 동쪽으로 성산일출봉, 남쪽으로 문섬과 범섬, 서쪽으로 산방산, 북쪽으로는 물찻오름과 붉은오름이 보인다. 숲길을 품고 있는 270㏊의 시험림에는 나도은조롱, 으름난초 등 법정 보호종을 포함해 330종의 식물이 서식한다. 멸종위기종인 참매와 팔색조, 그리고 삼광조 등도 살고 있다.

사려니 숲길 주변 도로는 최근 성수기마다 불법 주차된 차량들로 극심한 정체를 빚고 사고 위험도 높다. 박항순씨는 “사려니 숲길 남쪽 구간도 개방하라는 압력이 높은 실정”이라며 “그러나 무제한 개방할 경우 입구에 상점이 들어서고 숲 속에서 술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말했다. 주차장이 확대되면 산림 훼손은 시간문제다.

사려니 숲길은 다음 날인 4일 방문한 비자림 산책로와 대조적이다. 비자나무 숲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반면 사려니 숲길의 삼나무 숲은 조림된 것이다. 비자림은 1500원의 입장료를 받지만 사려니 숲길은 무료다. 비자림에 중국인 관광객들이 아직 단체로 들이닥치지 않고 있는 것은 유료인 덕분으로 보인다. 제주도에 따르면 올 들어 11월 말까지 비자림 탐방객 52만5465명 가운데 외국인의 대부분(98%)인 중국인들은 1% 남짓인 6200여명에 불과하다.

비자림은 조선시대에 조정이, 일제 강점기에는 마을 주민들이 도벌에 맞서 당번을 정해 총을 들고 지켰던 숲이다. 수령 820년의 ‘새천년’ 비자나무는 그렇게 지켜졌다. 약 45만㎡의 비자림에는 수령 400년 이상인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자생한다. 비자나무는 바둑판 등의 목재로서도 훌륭할 뿐더러 열매는 구충제, 강장제, 기침감기·황달의 약재, 등불기름 등으로 용도가 넓었다. 난대림연구소 김찬수 소장은 “이런 울창한 자연림이 수백년 동안 보전될 수 있었다는 것은 후세에 대단한 축복”이라고 말했다.

임항 논설위원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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