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포럼-엄상익] 마음이 추운 젊은 노인들에게 기사의 사진
지하철역에서 역무원에게 막차시간을 물을 때였다. 역무원은 내게 ‘어르신’이라고 했다. 친구 아들의 결혼식에서도 그런 소리를 들었다. 노인이라는 소리였다. 영원할 것 같던 젊음이 언제인지 모르게 소리도 없이 잦아들 듯 소멸했다. 30대 때 나는 60대인 지금의 나를 상상할 수 없었다.

노인들의 삶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십년 후면 대한민국 노인이 1000만명을 넘는다는 통계를 읽었다. 사업에 실패한 대학동창이 폐지 줍던 일을 털어놓았다. 하루 5000원을 받는 리어카를 빌려서 폐지를 찾아 헤매다 어느 날 멀리 신문지 뭉치가 놓여있는 걸 발견했다. 운 좋은 순간이었다. 그는 리어카를 끌고 급하게 가다가 옆에서 카트를 끌고 절뚝거리면서 그 폐지를 향해 가는 노파를 보았다. 그는 순간 ‘이러고도 살아야 하나?’라는 서글픔이 속에서 울컥 솟아올랐다고 했다.

늙고 병들어 눈물의 골짜기를 헤매는 노인들이 많다. 그들의 가난은 게을러서도 아니고 학력이나 경력이 모자라서도 아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허덕이다 보니 보랏빛 노을의 황혼이 된 것이다. 얼마의 퇴직금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일도 흔했다.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예부터 가난은 나라님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예수도 가난한 사람은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노인문제의 핵심이 무엇일까. 가난과 불행을 사회와 국가의 탓으로만 돌리는 건 공허하다. 물론 생존이 걸린 늙고 병든 노인들에 대해서는 선택적 복지의 혜택이 주어져야 한다. 그게 함께 사는 사회다. 그러나 장수하는 시대에 방황하는 젊은 노인들이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밥보다 의미와 자기 정체성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70대 초반의 노인은 동네 주유소에 기름 총을 잡으러 간다. 알바를 해도 품값을 더 싸게 받고 더 열심히 한다고 했다. 그는 가난해서 일하는 게 아니었다. 일을 하고 싶어서 한다고 했다.

몇 년 전 달동네 임대주택에서 암에 걸린 채 혼자 죽어가는 시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소년시절 정비공을 하면서 그는 두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당선됐던 천재였다. 외롭고 가난한 노년임에도 그는 감사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편하게 임대 아파트에 누워있을 수 있게 해 준 정부의 복지정책이 고맙다고 했다. 동네 중학교 식당에서 제공하는 남은 밥과 성당의 신도들이 가져다주는 반찬에 황송해했다. 그는 꽃에 매달린 아침이슬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다고 감탄을 했다. 그는 죽기 전날에도 시를 쓰다가 저세상으로 갔다.

그 시절을 살았던 아동작가 권정생씨의 삶이 담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폐병에 걸린 그는 어린 시절 집에서 나왔다. 형제들이 많은 그는 입을 하나라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깡통을 들고 거지가 되어 이집 저집을 돌아다녔다. 밤에는 다리 밑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그는 항상 품에 성경을 넣고 다녔다. 성경 속의 거지 나사로를 보고 그는 위로를 받았다. 평생을 병과 친구하며 소박하게 살던 그는 아동작가가 되어 받은 인세를 힘든 사람들에게 내놓고 죽었다. 가난해도 줄 수 있었던 그는 부자였다.

지금 노인세대의 핏속에는 가난을 이겨내는 강한 유전인자가 흐르고 있다. 세계에서 제일 낙후되고 가난한 국가에서 히말라야보다 높은 보릿고개를 넘은 경력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조받은 밀가루와 구호품인 헌옷들을 입고 자라났다. 대학을 졸업한 백수가 수제비 한 그릇 먹고 사직공원 벤치에서 오후를 보냈다는 시도 있다. 노년에 몸보다 마음이 추운 경우도 많다. 자기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다릴 게 아니라 현명한 노인이라면 스스로 찾아나서야 하지 않을까. 인도에서는 60세 노인이 되면 숲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있다. 숲에서는 신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북한산 자락에서 노년에 경전을 읽는 생활을 했다.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면 삶의 의미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엄상익 변호사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