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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만 칼럼] 대통령의 화법

“대화가 무거워지면 국정도 무거워지고 창조적 에너지는 짓눌린다”

[임순만 칼럼] 대통령의 화법 기사의 사진
청와대 문서유출 사건의 칙칙한 여파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정권의 이런저런 문서들이 나돌고, 관련자들이 검찰에 불려가고 하는 것은 권력 주변에 늘상 있어온 일이지만, 지금의 현안은 문서의 생산지가 청와대 공식 라인인 데다가 대통령의 측근들이 칡넝쿨처럼 얽혀 있어 여간 어수선하지 않다. 그러나 이 또한 별 탈 없이 지나갈 것이라고, 신뢰도가 낮은 정보문서 하나가 굴러다니며 눈덩이처럼 우수마발을 잔뜩 묻히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런데 이와 같은 문제가 앞으로 발생하지 않고 국정이 순탄하게 굴러갈 것인지 하는 점에 있어서는 안도할 수 없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청와대가 쾌청한 행보를 보여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고, 대통령의 발언도 자꾸 무거워지면서 피로감을 보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7일 새누리당 의원들과의 청와대 오찬 회동에서 “언젠가 세상을 떠날 텐데 일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모든 것을 바치자. 나라가 잘되고 국민이 행복하게 되는 것이 나의 목적이고 그 외에는 다 번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지금까지 그 하나로 살아왔고 앞으로 (세상을) 마치는 날까지 그 일로 살아갈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이와 유사한 발언은 올해에만 해도 신년 기자회견을 포함해 몇 차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얼핏 보면 국민들 입장에서 이보다 더 듣기 좋은 말은 별로 없을 것이다. 국민행복이라는 목적 외에는 개인적인 삶의 목적이 없으며, 그것만을 위해 살아갈 것이라는 말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런 메가톤급 발언은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감을 준다. 이런 발언이 자주 나오면 내각과 청와대는 경직되고, 국민은 의구심을 갖게 될 것이다.

대가족을 거느린 집안의 가장이 가솔들을 훈육하기 위하여 “나는 평생 가족들을 위하여 모든 걸 다 바쳐왔다. 남들이 다 하는 해외여행 한 번 안 가고 휴가도 한 번 안 쓰고 일하며 가족을 먹여살려왔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겠다”고 말한다면 어떤 효과가 나타날까. 가장이 그 말을 일생일대에 단 한 번 했다면 그것은 가문의 명언과 유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본인이 직접 그런 말을 하기보다는 끝내 아껴두는 것이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 향기는 저절로 흩날리는 법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1년에도 몇 번씩이나 한다면 가족들은 그 말의 신선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 무거움 때문에 애를 먹게 될 것이다. 장남은 당장 집안일을 처리하는 데 경직된 자세를 보일 것이고, 차남은 여행 계획을 취소할지도 모를 일이다. 막내아들은 “엄마, 아버지는 왜 자꾸 그렇게 끔찍한 말을 해요? 뭔 일 있어요?”라고 물어보게 될 것이다.

치열한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이루겠다는 일관된 의도를 노출시킨다면 대화는 딱딱해진다. 장관들은 웃거나 떠들지 않고 노트 필기에 열중하게 될 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현인들의 경험과 아이디어들이 만개 방창하지 못하고 공간을 장악하려는 욕망이 회의장을 억누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원래의 계획과는 다른 말을 잘하고 상황을 자꾸 다른 길로 가게 만들며 갈등을 생겨나게 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더 좋은 것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장차관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이런 자연스러운 습성이 나타나도록 해준다면 의외의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 농담과 웃음이 흐르도록 하는 이런 배려 하나가 열 말을 능가하지 않을까. 그래야 지도자가 여유 있어 보이고, 모인 사람들도 모두 근사하게 비치지 않을까.

이순신 장군의 어록과 같이 장엄한 말은 영화에서는 포인트가 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되기 어렵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대통령이 소풍가는 날 아침같이 경쾌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한 사람들은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청와대가 좀 더 화창해졌으면 한다.

임순만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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