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 어디로 가나 (1)] 진보정당 맏형의 ‘종북딱지’… 존립기반 뿌리째 흔들 기사의 사진
헌법재판소의 19일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으로 국내 진보정치 지형이 뿌리부터 뒤흔들리고 있다. 헌재는 법리적 해석을 내렸지만 그 파장은 법리적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사회 전반을 강타하고 있다.

당장 진보정치는 붕괴냐 재탄생이냐는 기로에 섰다. 이 과정에서 보수와 진보 간 극심한 사회적 갈등이 우려된다. 장기적으로는 종북주의와 결별한 새로운 진보정치를 위한 ‘파괴적 창조’ 노력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진보정치, 당분간 몰락 불가피…재탄생 가능할까=통진당 해산은 진보정당의 존립기반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것으로 분석된다. 통진당은 선고 직전까지 이석기 의원을 포함해 국회의원이 5명이고 당원은 10만명에 가깝다. 민주노동당에서 갈라져 나온 정의당 역시 소속 의원이 5명(당원 1만5000명)이지만 규모를 감안하면 진보정당의 맏형은 통진당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통진당이 ‘종북 정당’이라는 철퇴를 맞고 사라지면서 진보정치 진영은 몰락이 불가피하다. 정의당이 유일한 원내 진보정당이 됐지만 진보진영을 아우르기에는 대표성이 떨어진다. 2000년 민노당 창당 이후 쌓아온 대중적 진보정당의 기반이 상당부분 붕괴됐다고 볼 수 있다.

더 중요한 대목은 헌재가 붙인 ‘종북 딱지’다. 그동안 정치권은 뜨거운 종북 논란을 거듭했지만 정쟁 차원에서 다뤄졌던 것과 헌재의 선고는 차원이 다르다. 헌재 역시 소수였던 해산반대 의견에서 “대다수 일반 당원들을 위헌정당 당원으로 만드는 사회적 낙인효과를 가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북한 문제는 물론이고, 종북과는 무관한 진보적 정책과 담론 자체가 크게 위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대 총선 이후에도 진보정당의 위기는 계속될 수 있다. 통진당 해산 세력이 새 진보정당을 건설하더라도 환골탈태가 없다면 유권자들은 외면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진보정당들은 최근 몇 년 동안 거듭된 종북 논란과 내부 분열, 선거 부정, 대중과의 분리 등 심각한 한계를 노출하면서 이번 사태를 자초한 측면이 크다.

민노당 출신인 박용진 새정치민주연합 전 대변인은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은 국민적 반발로 무산됐지만 ‘통진당 탄핵’은 국민들이 막아주지 않고 있다”며 “진보정치 세력 모두가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통진당 해산은 자연스럽게 ‘종북 프레임’에 갇혔던 진보정치 지형을 바꾸고 재탄생시키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외부의 강력한 충격으로 고인 물과 같던 진보정치에 파괴적 재창조가 일어날 수 있다는 기대다. 종북 논란에서 자유로운, 양당 구도에서 벗어난 진보정치를 필요로 하는 정치적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민생진보와 같은 구호가 증가할 수 있다. 해산 선고 이전부터 통진당에 실망한 제3의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물밑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다시 타오르는 보수·진보 이념 전쟁=통진당 해산 사태는 사회 전반에 걸쳐 보수와 진보의 대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보수와 진보 진영 각각 내부에서도 헌재가 통진당을 해산하는 게 과연 의회 민주주의 원리에 맞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헌재가 찬성 8, 반대 1이라는 압도적 해산 결정을 통해 우리 사회에 던진 ‘보수화 메시지’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박근혜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보수와 진보의 극심한 갈등에 시달렸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등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의혹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파동은 온 나라를 이념전쟁으로 불타오르게 했다. 최근에는 민간단체의 대북 삐라 풍선 날리기, 재미동포 신은미씨의 종북 콘서트 등이 이념갈등에 불을 붙였는데, 여기에 통진당 해산 선고는 기름을 끼얹고 있다.

헌재 판결로 보수 진영은 이념 논쟁의 주도권을 잡게 될 전망이다. 하지만 진보단체들이 장외에서 해산 반대 촛불집회를 열고, 보수단체들이 반발 집회를 여는 일이 반복될 경우 ‘이념갈등에 따른 사회적 피로도’는 급증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정부 3년차가 촛불집회로 시작되는 것은 국가적으로 볼 때 득보다 실이 많다는 지적이다.

엄기영 기자 eo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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