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완충지대가 필요하다 8] 英 특수학교, 위기의 아이들 ‘자존감 회복’에 초점 기사의 사진
영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레드벌룬센터의 교실 모습. 미술교실에는 괴롭힘을 당했던 학생들이 제작한 미술작품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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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가명·15)는 남들에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 누가 뭘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자폐증을 가진 소년은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늘 혼자였던 그는 다니던 학교에서 따돌림, 괴롭힘의 대상이 됐다. 급우들은 쉬지 않고 괴롭혔다. 쉬는 시간엔 "말을 좀 해보라"며 때리기 일쑤였고, 수업 시간엔 그의 귀에 "벙어리 자식, 벙어리 자식"이라고 속삭였다. 교사들도 힘이 되지 못했다. 어떤 질문에도 '묵묵부답'인 아이의 속마음을 읽어내기엔 교사들이 챙겨야 할 학생이 너무 많았다. 토니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부모의 속도 타들어 갔다. 이미 급우들로부터 오랫동안 상처를 받은 토니는 집에서도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지역 공공기관을 통해 교사를 섭외해 개인교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개인교사들은 그에게 필요한 사회적·감정적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켜줘야 할지 전혀 몰랐다. 토니는 지난해에만 6번 가출했다. 마지막으로 집을 나갔을 때 그는 근처 도로에서 빠르게 달리는 차를 향해 뛰어들기 직전 발견됐다. 그의 손목엔 자살을 시도했던 자국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부모와 토니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대학도시인 영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작은 특수학교 ‘레드벌룬센터’였다.

상처가 아물도록 도와주는 ‘레드벌룬’

지난달 찾은 레드벌룬센터는 학교처럼 보이지 않았다. 가정집을 개조한 이곳은 학교에서 튕겨 나온 아이들을 위한 ‘완충지대’다. 교육 컨설턴트 허버트 박사는 1996년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 학생들이 결국 학교에 가지 않게 된다는 점에 주목해 레드벌룬센터를 만들었다. 케임브리지 외에도 영국에 5개 센터가 있다.

지상 4층, 지하 1층 건물에는 10개가 넘는 작은 교실이 오밀조밀 이어져 있다. 각 교실은 들어서는 순간 무엇을 가르치는 곳인지 알 수 있다. 갖가지 형태의 도형이 벽에 붙어 있는 곳은 수학교실, 괴테 작품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그림이 그려진 방은 문학교실이다. 비록 작지만 과학교실에는 비커와 플라스크 등 실험 장비와 재료가 빠짐없이 갖춰져 있었다. 음악교실에는 기타 드럼 건반이 놓여져 있고 학생들이 직접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스튜디오도 있었다.

작은 교실에서 수업이 진행된다. 수업의 대부분은 일대일 방식이다. 아이들의 다양한 상처를 교사가 이해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즉각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센터의 코디네이터 제시카 레흐너는 “레드벌룬센터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며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소심한 학생들이 오는 곳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는 집중적인 배려와 관심”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학생보다 교사가 더 많다. 학생 16명을 교사 20명이 지도하고 있다.

“좋아해야 빨리 배운다”… 자존감 회복이 목표

수업의 목표도 학업 성취보다 자존감을 높이는 데 맞춰져 있다. 좋아해야 빨리 배운다. 그러려면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교사로부터 긍정적 피드백을 받는 아이는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20명의 교사 중에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학교 밖에서 외부강사 혹은 재능 기부자를 섭외한다. 레흐너는 “학생들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겠다는 자원봉사 인력풀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소셜포비아’(Socialphobia·타인과의 관계를 회피하고 사회적 기능이 저하되는 정신과 질환)를 겪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지하철에서 어떻게 승차권을 끊고, 박물관에 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가르친다. 일반 학교에서 적응할 수 있는 방법,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괴롭힘에 대한 대처법 등을 교육하는 것도 센터의 주요 목적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센터의 다른 학생과 일대일로 얼굴을 맞대고 개인적 경험을 공유하는 ‘서클타임’도 가진다. 아이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을 얘기하며 자존감을 찾는다. 센터는 스스로 다니기를 원하는 학생만 받고, 다른 학생과 교직원에게 존경·배려를 표시할 수 있는지 엄격하게 따진다. 하지만 이를 지키지 못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센터 학생들의 출석률은 95%가 넘는다.

두 달 만에 수업시간에서 질문을 쏟아내다

토니는 수학과 과학, IT 과목에서 자신의 재능을 찾았다. 레흐너는 “처음 몇 번은 센터에 오는 것조차 무서워 길에서 구토를 하던 과묵한 소년이 불과 두 달 만에 과학 선생님에게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주일에 이틀 출석하고 하루에 두 시간 수업을 받던 토니는 지금 1주일에 닷새를 꽉 채워 레드벌룬센터에 온다. 경제 독일어 윤리 디자인공학 등 다른 과목에 도전하는 중이다. 이 중 몇몇 과목에는 다른 학생과 그룹 활동도 포함돼 있다. 그는 더 이상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센터는 학생들을 무작정 오래 데리고 있지도 않는다. 교사 조 부페는 “레드벌룬은 괴롭힘을 경험한 아이들이 다시 일반 학교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완충지대”라며 “아이들 스스로 일반 학교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 지체 없이 돌려보낸다”고 했다. 아이들이 머무는 기간은 보통 1∼2년이다. 괴롭힘을 당했던 이전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로 가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일반 학교 정착률은 90% 이상이다. 지난해 5명 중 4명이 일반 학교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한 학생은 ‘틱 장애’ 때문에 센터로 돌아왔지만 내년 말 다시 기회를 노려볼 생각이다.

특수학교에 다녔다는 ‘주홍글씨’가 남을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 학생이나 학부모가 원치 않으면 새로 가는 학교에 그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정착 이후에도 사소한 문제가 생기면 학생들이 상담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고 있다. 레흐너는 “문제가 생겼다는 전화보다 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는 학생의 전화가 걸려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뿌듯해했다.

케임브리지(영국)=글·사진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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