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국교정상화 50년] 남북 經協, 정치 논리에 휘둘려 명맥만 유지 기사의 사진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남북 간 경제협력 사업은 수차례 위기의 파고를 지나며 아슬아슬하게 명맥을 이어왔다. 양측의 군사적 긴장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이뤄진 경협은 경제논리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심한 부침을 겪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88년 7월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하며 남북경협의 신호탄을 쐈다. 이를 토대로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은 89년 1월 방북해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과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했다.

90년 8월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교류협력법이 제정되면서 남북경협은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96년 9월 북한의 잠수함 침투 사건으로 우리 정부가 대북 지원·투자를 동결하는 등 냉각기를 거쳤지만 98년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천명하면서 남북경협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98년 6월 정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거쳐 북한을 전격 방문한 사건은 남북경협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정 명예회장은 북한 측과 금강산 관광 사업에 합의했고, 같은 해 10월 2차 소떼 방북을 단행했다. 11월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가 첫 출항을 하는 등 남북경협은 황금기를 맞는 듯했다. 하지만 99년 6월 관광객 민영미씨가 북측에 의해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금강산 관광은 첫 시련을 맞았다. 관광객에 대한 신변보장책 등 협상이 진행된 뒤 8월 관광이 재개됐다.

2000년 8월 현대아산과 북한의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개성공업지구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했고, 2003년 6월 ‘남북경협의 옥동자’로 평가받는 개성공단이 착공됐다. 이어 2004년 12월 개성공단에서 첫 제품이 생산됐다. 대북포용정책 기조를 계승한 노무현정부 기간 남북교역 규모는 대폭 증가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이후 북한의 비핵화와 남북관계를 연계하는 ‘비핵개방 3000’을 대북정책으로 내세웠고, 북한은 대남 도발행보에 나서면서 남북 간 긴장이 심화됐다. 2008년 7월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군 총격에 의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금강산 관광까지 다시 멈췄다.

급기야 2010년 3월 천안함이 피격되자 정부는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경협을 전면 중단하는 5·24조치를 발표했다. 박근혜정부 들어서는 북한이 근로자를 전원 철수시키는 등 개성공단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5개월 동안 이어진 갈등 끝에 겨우 정상화된 개성공단은 30일 현재 사실상 유일하게 남북을 잇는 경협 사업으로 가동되고 있는 실정이다.

유성열 기자 nukuv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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