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속의 샘] 모두가 갑이 되는 날 왔으면 기사의 사진
요 몇 년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사회 현상 가운데 하나가 갑의 횡포이다. 하청업체로부터의 리베이트나 아파트 경비원의 자살이 세간의 관심을 끌더니 근래 땅콩 회항 사건에서 그 정점을 보여주었다. 회항 사건은 라면 폭행 사건에 이어 비행기 기내에서 일어난 사건인 데다 임원급 간부가 승무원의 인격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공통점 때문에 더욱 주목을 받았다. 갑의 횡포를 갑질 또는 슈퍼 갑질이라고 비하하는 표현에서 몹시 불편한 대중들의 속내를 읽을 수 있다.

모 방송사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갑과 을’이란 제목의 코너가 방영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갑의 횡포는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고질적인 적폐이다. 본래 갑과 을은 계약의 양측 당사자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계약 당사자의 권력관계가 현저할수록 갑의 횡포는 두드러진다. 이는 국가와 국가 간에서부터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이르기까지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때문에 오늘에 와서는 계약 관계와 상관없이 힘을 가진 자의 폭력이 대개 갑의 횡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지난 역사에서도 수많은 갑의 횡포가 있었다. 민담에는 중국 사신이 조선에 와서 수수께끼를 내, 임금과 고위 관료를 골탕 먹이는 얘기가 많다. 그때마다 번번이 바보가 등장해 막힘없이 척척 풀어내는데, 알고 보니 바보의 엉뚱한 몸짓이 중국 사신의 눈에 정답처럼 보였다는 결말로 대개 끝을 맺는다. 이런 민담엔 외교와 내정을 지나치게 간섭한 강대국의 횡포와 그 때문에 애를 끓였던 우리의 고단한 처지가 오롯이 희화화되어 담겨 있다. 근대를 거치면서도 우리는 끊임없는 열강의 횡포에 시달려야 했다. 우리가 외국과의 협정에 유난히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오랜 세월 갑의 횡포에 시달린 설움 때문에 생긴 조건반사인 듯하다.

나라 안으로 한정해 말하면 양반의 횡포가 있었다. “이웃 소로 제 밭 먼저 갈고, 일꾼 뺏어 김을 매도 누가 나를 거역하리. 상놈 코에 잿물 붓고, 상투 잡아 도리질하고, 귀얄수염 다 뽑아도 감히 원망 못하리라”라고 신랄하게 비꼰 박지원의 장사설은 사실 희떠운 너스레가 아니라 제 계급의 특권만은 악착스레 지켜온 양반사회의 부끄러운 이면이었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도 변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상명하복의 일방통행으로 진행되는 측면이 많다. 정치권에서는 한동안 최고 권력자의 성에 마음이라는 뜻의 한자를 붙여 ‘모심(某心)’이란 말이 유행했다. 최고 권력자의 마음을 잘 헤아려 받들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 전제된 말이다. 이는 성숙하지 않은 민주정치의 반영(反影)이요 오랜 독재정치의 잔상에 다름 아니다. 사소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갑의 횡포가 기형적으로 변형되어 고착된 현상이라 하겠다.

경제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경영인은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을 사유물로 생각하고, 직원들을 자신이 밥을 먹여 살려주는 일꾼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와 문화는 일가 독재경영의 문화를 만들었다. 특정 기업 내에서 경영인 일가는 무소불위의 권능을 휘두를 수 있게 되고, 여기에 항의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순간 세상을 모르는 철딱서니 취급을 당하거나 자신을 살려준 주인을 해하는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몰린다. 갑의 횡포는 이처럼 권력 중심의 일방소통 사회에 일어나는 적조현상이다.

가진 자의 횡포가 당연한 권리처럼 행사되어오는 동안 그 야만적인 관습은 곳곳에 깊게 배어들었다. 조금만 상대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스스럼없이 진상을 떨어대는 나의 모습을, 또 이웃의 모습을 일상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요컨대 경비원 폭행이나 땅콩 회항은 그것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례요 적조현상의 독성에 중독된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적조가 심각해진 바다는 산소를 잃고 제 안의 모든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공자는 마구간에 불이 났을 때 다친 사람은 없느냐고 물었을 뿐 말의 피해 상황은 묻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책임자에 대한 문책성 처벌도 없었으리라. 공자의 일화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갑의 횡포를 공자의 경우처럼 위정자나 경영인의 덕목으로 요구해 해결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 보인다. 거이기(居移氣)라고 했던가. 선 자리가 달라지면 시각도 가치관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것을 개인 인격의 함량미달 여부로만 치부하고 말아서는 곤란하다.

중국 송나라 소순은 세상의 모든 사람은 알고 보면 형제이고, 형제는 한 부모 아래서 난 사이라는 말을 했다. 소순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모두 한 조상의 자손이요 온 세상 사람이 모두 형제가 된다. 이런 논리가 극단적으로 확장되면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가 되겠지만, 그리 거창할 것까지도 없다. 그저 타인을 나와 같은 고귀한 존재로 여기고 서로 존중한다면 어이없는 갑의 횡포는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새해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갑이 되는 세상이 되길 빌어본다.

이규필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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