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어제와 오늘] 인재 양성·민주화 기여·이웃 사랑… 세계 선교대국 우뚝

‘ㄱ∼ㅎ’ 14개 키워드로 본 한국교회 발자취

[한국교회 어제와 오늘] 인재 양성·민주화 기여·이웃 사랑… 세계 선교대국 우뚝 기사의 사진
1984년 8월 15∼19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된 ‘한국기독교100주년선교대회’는 이 땅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에 대한 감사와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자리였다.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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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한국의 근현대 문화를 낳았으며 새 역사를 썼다. 일본 제국주의를 뛰어넘은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탄생한 140여개국 가운데 제10위 규모로 성장했다. 세계전쟁사상 3번째로 규모가 큰 6·25전쟁의 큰 아픔과 그로 인한 극심한 폐허와 가난을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일궜다.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걸어온 발자취를 ‘ㄱㄴㄷ…’으로 정리해봤다.

기독교, 한국에 살다: 한국의 기독교 선교는 삼각구조로 이뤄졌다. 먼저 학교가 세워지고 병원이 건립됐으며 교회가 뒤를 이었다.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서와 교리교육을 시켜 교회 지도자로 세웠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필두로 수많은 사립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의 초석을 다졌다.

남침(南侵)야욕으로 분단: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처음에는 북한과 남한의 싸움이었으나 곧 유엔군과 소련·중공(중국군)이 참전함으로써 국제적인 전쟁으로 확대됐다. 45년 8월 이후 미국과 소련 군대가 한반도를 점령하면서 생긴 일시적인 경계선은 냉전의 고착화와 함께 항구적인 분단선이 됐다. 남한에서 교회는 사회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지만 북한에선 사실상 교회 공동체가 사라지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도시빈민선교와 농민선교: 60년대는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공업화가 급속히 추진됐다. 이로 인해 전통적인 농업 부분이 쇠퇴해 농촌의 노동력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도시 빈민촌이 형성됐다. 이와 같은 사회 변동은 교회의 선교방식과 내용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부 교역자들은 노동자, 도시빈민을 대상으로 한 산업선교, 도시빈민선교 활동을 주도해나갔다.

로잔언약(Lausanne Covenant)에 서명: 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제1차 세계복음화국제대회에서 채택된 로잔언약은 복음전파와 사회참여를 모두 “그리스도인의 의무”로 규정했다. 이것은 전통적인 신학과 가치관을 유지하면서도 변화하는 세계의 요구에 부흥하려는 노력이었다. 이 대회에 참석했던 한국 대표들로 이 언약에 서명한 뒤 각종 사회변혁 운동을 이끌었다.

민중신학 열기 퇴조: 60년대 한국 신학계가 토착화 논쟁을 낳았다면 70년대 한국 신학계는 민중신학을 태동시켰다. 민중신학의 출현에는 사상적 토양도 작용했으며 신학적으로 심화시킨 이는 성서신학자인 안병무였다. 그는 마가복음의 오클로스 개념을 재조명하면서 민중을 예수 사건의 중심부에 놓았다. 하지만 이 신학은 90년대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퇴조하기 시작했다.

보수신학의 태동: 오랫동안 이어진 군사독재의 고통스러운 시기를 통과하는 가운데 근본주의적 신학은 교회 자체의 성장 이외에 의미 있는 사회적 기여나 자기 혁신을 하지 못한 채 그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적절한 답을 제공하지 못했다. 이때 그들에게 돌파구를 마련해준 것이 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도입된 보수주의 신학이었다. 세속적 대중문화를 비판하면서 기독교적 대안문화를 창출하려는 기독교 학문운동과 기독교 대학 설립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신학교육의 열정: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신학 부문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교역자 수요가 증가하면서 신학 교육에 대한 요구가 크게 늘었다. 59년 예수교장로회가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분열되면서 서울 남산에 있던 총회신학교도 분립됐다. 합동은 사당동 캠퍼스에 총회신학교를 세웠고 통합은 광나루에 장로회신학교를 창립했다. 또한 연세대와 이화여대 등 종합대학에 신학 관련학과들이 잇따라 설치되기도 했다.

에큐메니컬과 연합운동: 한국 기독교는 처음부터 다양한 교파들로 구성됐다. 새로운 교단이 생기기도 하고 기존 교단이 분열을 하기도 했다. 70년대를 지나면서 교회는 보수와 진보로 양극화되는 현상을 보였다. 이때 진보 진영의 대표 역할을 한 것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였다. 교회협의회는 군사정권시절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으며 80년대 접어들어서는 통일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89년 초 100주년 기념사업에 참여했던 한경직 강원용 조향록 지원상 등 교계 인사들은 교회협의회가 한국교회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그해 12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를 창립했다.

전후 한국의 기독교: 북한 출신 기독교인들은 독자적인 교회 건립에 앞장섰다. 45년 말 한경직 목사(평남 영락교회)와 김재준 목사(함북 경동교회)는 군정청의 도움을 받아 서울시내 40곳에 달하는 천리교 재단을 접수하고 교회 설립에 착수했다. 해방 이후 북한 출신 기독교인들은 한국 기독교의 놀라운 성장을 주도했다. 특히 민족복음화 운동은 70∼80년대 들어 절정에 달했다. 73년에 있었던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로 포문을 열었다. 이후 74년 엑스플로74와 77년 민족복음화 대성회, 84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치유의 손길로 복음 전달: 해방 이후 국내 의과대학에서 일본인 교수들이 떠난 뒤 빈 자리를 메운 것은 세브란스의 교수들이었다. 최초의 의무기록제를 도입한 원주기독병원은 76년 연세대에 합병돼 83년부터 연세대 원주의과대학 부속 원주기독병원으로 거듭났다. 광주기독병원은 폐결핵 환자들을 입원과 가정방문을 통해 치료했다. 대구동산병원은 80년 의과대학을 설립해 계명대 동산의료원이 됐다. 부산의 일신기독병원은 50년대부터 선진화된 의술에 사랑과 관심으로 여성과 산모와 갓난아기의 생명을 구해왔다.

‘크리스챤아카데미’ 모임: 60년에 설립돼 한국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단체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모임을 이끌었던 강원용 목사는 이른바 ‘진보적인 중산층’의 교육에 주안점을 두었고, 그 일환으로 미국에서 공부한 페미니즘을 여대생들에게 교육시켰다. 문화부 장관을 지낸 신낙균과 국무총리를 지낸 한명숙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통일운동 가장 큰 사명으로: 80년대 한국교회의 변화는 통일을 교회의 가장 큰 선교 과제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해 3월 기독교장로회는 통일이 교회의 선교적 과제임을 천명했다. 92년 1월에는 한국기독교협의회 총무 권오경 목사와 남한 교회 목사들이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을 면담하기도 했다.

파라처치(para church) 운동: 한국교회 역사에서 대학생 선교단체의 수련회 영향은 지대했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의 ‘거지순례’나 예수전도단의 ‘전도학교’ 등은 70∼80년대 한국교회 부흥과 선교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대학생 선교단체가 ‘교회 밖 선교단체’라는 뜻의 ‘파라처치’로 불리면서 지역교회 선교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해외선교로 세계복음화 앞장: 한국교회의 부흥은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과 선교사 파송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졌다. 선교방식에 대해 여러 가지 논란이 없지 않지만 해외선교는 한국 기독교가 경험하고, 세계를 위해 봉사하며 한 단계 더 성숙한 기독교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1만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세계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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