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아픔을 넘어] “무국적자 취급 온갖 차별… 발전한 조국 보고 자신감”

2007년 아내와 영구 귀국한 사할린 동포 이종백씨

[디아스포라 아픔을 넘어] “무국적자 취급 온갖 차별… 발전한 조국 보고 자신감” 기사의 사진
30일 인천 남동구 고잔감리교회에서 이종백씨가 사할린 동포가 겪은 수난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인천=강민석 선임기자
“1945년 8월 15일, 조국은 독립했지만 사할린 한인들에겐 시련이 계속됐습니다. 구소련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도 이곳을 떠나지 못한 우리를 무조건 ‘일본인’으로 치부하며 식량을 강탈했습니다. 갓난아기에게 몽고반점이 있다고 우리를 ‘검은 궁둥이’라고 속되게 부르기도 했지요.”

30일 인천 고잔감리교회에서 만난 이종백(74)씨는 광복 이후 사할린 동포가 겪은 수난사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씨는 1940년 구소련 사할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과 냉전, 분단의 슬픈 근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역사의 산 증인이다. 2007년 아내와 함께 영구 귀국한 이씨는 러시아 억양이 남아있는 말투로 이국땅에서 겪은 애환을 담담히 전했다.

충북 충주에서 살던 이씨의 아버지는 39년 일제에 의해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됐다. 당시 이씨를 임신 중이던 어머니도 남편을 따라 사할린으로 이주했고, 이듬해 2월 이씨가 태어났다. 이들 가족은 아버지가 일본인의 감시 하에 일하던 탄광 도시 우글레고스크에 정착했다.

45년 조국의 해방소식은 동토의 이국땅에도 어김없이 전해졌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일본령 사할린을 점령하기 위해 소련군이 남하했다. 전쟁 뒤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던 구소련인들은 사할린의 한인들도 ‘일본인’이라 부르며 강도짓을 일삼았다. “거기 사람들도 그랬지만 당시 우리도 먹을 게 정말 없었어요. 매일같이 감자와 호박만 먹었지요. 한인들이 모여 사는 게 아니어서 약탈당해도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48년 일본이 자국민을 데려가 한인들만 남았는데도, 구소련인들은 우리를 ‘일본인’이라 부르며 비하했습니다.”

사할린 동포들은 조국에 돌아갈 수 없을까 우려해 구소련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구소련은 무국적자인 조선인들의 자유를 억압했다. 당국의 허락 없이는 이사를 가거나 여행을 떠날 수 없었다. 교육과 취업의 기회도 제한됐다. 이씨도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사할린의 유일한 대학인 사범대를 졸업해도 국적이 없으면 교단에 설 수 없었다.

“동양인은 외모만으로도 구별이 되니까, 당국의 단속이 아주 엄격했습니다. 구소련 대륙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도 무국적이라는 이유로 허가증을 받지 못한 동창생이 적지 않았지요.”

북한이 사할린 동포를 대상으로 귀국 사업을 벌인 것도 이즈음이다. ‘무국적자’란 꼬리표로 각종 차별을 겪던 사할린 동포들은 대학 진학을 지원한다는 북한의 홍보에 솔깃했다. 이씨의 동창들은 대거 북한행을 택했다. “북한 대사관에서 나와서 우리에게 선전했던 때가 58년입니다. 당시는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살았지요. 대학을 공짜로 보내주겠다는 등 여러 혜택을 약속했습니다. 이 말에 학급 인원 60명 중 40명이 북한으로 갔지요. ‘북한도 조국’이란 생각에 고향이 남한인 이들도 많이 갔어요. 그땐 조만간 통일이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이씨는 북한행을 택하지 않았다. 먼저 북한으로 간 사촌동생과 한 약속 때문이다. 사촌동생은 이씨에게 “내가 먼저 들어가 편지를 보내겠다”며 “편지지 끝이 찢어져 있으면 내용이 거짓인 줄 알라”는 말을 남기고 북한으로 떠났다. 얼마 뒤 북한에서 온 편지에는 김일성 찬양문구가 대부분이었고 편지지 한 귀퉁이는 찢어져 있었다.

“87년 업무 차 모스크바에 들른 사촌동생을 만났는데 둘만 있는데도 말조심을 하더군요. 사촌동생이 같이 온 북한 동료에게 귀국길에 잠깐 가족을 만나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사촌동생 집이 하바롭스크라 온 가족이 북한행 열차가 정차하는 역에서 기다렸지만 얼굴조차 내밀지 못했죠. 참 슬픈 역사지요.”

이씨는 40년 간 무국적자로 살았지만 자녀교육을 위해 80년 소련 국적을 취득했다. 자식들만은 대학 교육을 받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광산에서 일하다 50세에 은퇴한 뒤 친척들과 함께 하바롭스크로 이주한 그는 92년 적십자 초청으로 처음으로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비행기에서 조국 땅을 내려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국에 도착하고 나서도 벅찬 감정 때문에 얼마간 말을 못 할 정도였다. “잿더미에서 우리 민족이 이렇게 일어났는가 싶었어요. 이제 구소련인이 우리를 차별해도 조국이 힘이 있으니 할 말이 생겼지요. 이때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씨는 2007년 아내와 함께 영구 귀국했다. 이씨 부부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으로부터 매달 94만원을 지원받는다. 집 임대료와 공과금 등이 40만원씩 들어 빠듯한 살림이지만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말이 좀 불편하고 지원금이 부족해서 그렇지, 교회와 봉사단체에서 도와주기 때문에 크게 부족한 것은 못 느낀다”며 “아내와 함께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도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 동포들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의 가슴은 찢어진다. “70년이면 한 사람의 인생과 맞먹는 시간이잖아요. 이제는 그저 통일이 됐으면 참 좋겠어요. 정치와 이념 그런 걸 떠나 배고픈 북녘 아이들 실컷 많이 먹게 말이요.”

인천=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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