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약사 출신 김희선씨 “약국에서 만난 무수한 사연 기억… 모든 등장인물에 존중 담고 싶어요” 기사의 사진
첫 소설집을 낸 약사 출신 작가 김희선씨가 13일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갖고 있다. 그는 “약국에 오는 손님들의 아픈 사연을 들으며 사람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동희 기자
문단에 ‘무서운 신인’이 나타났다. 비상한 이야기꾼이다. 신문 귀퉁이에서, TV에서, 혹은 누군가와 얘기하다 슬쩍 건져낸 소재에 근현대사를 직조해 넣는다. 너무 그럴듯해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첫 소설집 ‘라면의 황제’(자음과모음)를 낸 김희선(44) 작가는 신인 치고는 나이가 제법 많다. 13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 내 한 카페에서 그를 인터뷰한 건 이력이 구미를 당긴 탓도 있다. 약사 출신. “10여년 약국에서 살았다”는 그는 육아 때문에 약국을 그만뒀다. 무료해 대학원 국문과에 들어갔고, 어쩌다 투고한 게 상을 받아 작가가 되었단다.

수록된 9편 중 첫 단편 ‘페르시아 양탄자 흥망사’를 읽다 상당수가 진짜 얘긴 줄 알고 속을 뻔 했다. 한 때 가정집 마룻바닥을 점령했던 황금색 덩굴무늬 붉은색 카펫의 출처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란 북동부 호라산 지역 수공예품이 원조라나. 그 지역 수공업자가 1977년 당시 테헤란 시장이 한국을 방문할 때 수공업계 대표로 동행하면서 하나 선물로 가져온 게 서울시장실에 깔렸다. 1979년 12월 13일 양탄자는 급작스레 철거됐고, 마침 거기 있던 세탁부 직원 김선호씨도 시청을 그만두게 되는데….

모조품의 대인기를 불렀던 양탄자 흥망사에는 한국뿐 아니라 이란의 현대사까지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진다. 김씨는 “소재와 첫 문장이 정해지면 그 다음엔 가지 뻗듯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된다”고 했다. 다독을 비결로 들었다. 한달에 20∼30권을 주문한다고.

그래선지 이야기가 종행무진이다. 표제작인 ‘라면의 황제’는 라면 유해론 탓에 라면이 금지된 미래의 어느 날, 라면 동호회가 불러낸 라면의 영웅 고(故) 김기수씨 이야기다. 그는 라면가게 주인으로 27년간 라면만 먹은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뻔 했다. 하지만 우루과이에서 무슨 협상이 타결됐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밥이 안 넘어가 라면만 먹고 살아온 박모 노인에게 ‘라면 먹고 오래 버티기’ 타이틀을 뺏겼다. ‘교육의 탄생’에선 천재 소년이 미국항공우주국(NASA)에 채용돼 ‘두뇌 하청’ 같은 일을 하지만 그는 ‘조국의 발전’을 위해 일 한다고 생각한다. ‘2098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엄마 없이 자라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외계의 인간복제 기술을 배우려는 과학자가 나온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픽션을 그는 이야기 하듯 들려준다. 노래처럼 리듬이 있는 문체에서는 그런데 슬픔이 묻어있다. 다루는 주인공들 때문일 게다. 다 사회적 약자들이다. ‘페르시아 양탄자 흥망사’의 세탁부 김선호씨는 정치적 격변과 무관하게 묵묵히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이다. ‘라면의 황제’에서 라면가게 주인 김기수씨, 박 노인도 주변부적 인간이다. ‘2098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주인공은 엄마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한 근본적인 애정 결핍을 지니고 있다.

강원도 원주 변두리에 위치했던 약국이 그를 소설가로 키운듯하다. 못살거나 나이든 사람들이 약을 사러왔다. 그는 “약값을 내미는 투박한 손을 기억한다”면서 “거기서 무수한 사연을 봤고, 모든 등장인물에 존중을 담고 싶다”고 말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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