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한홍] 통제와 자유의 간극 기사의 사진
지난 7일, 프랑스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엡도’의 파리 사무실에 무장괴한들이 난입해 12명의 언론인 등을 사살한 사건은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반종교적이고 좌파 성향이 강한 이 잡지는 그간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만평을 자주 게재하는 바람에 수많은 이슬람교도들의 증오 대상이 되어 왔다. 그렇다고 해도 2차대전 이후 프랑스에서 발생한 이 최악의 테러 사건은 프랑스의 자부심인 톨레랑스, 즉 관용의 정신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프랑스 국민들을 위로하면서 “테러가 자유의 적수가 못 된다”고 했다. 하지만 9·11테러 이후 자유와 인권을 부르짖던 미국도 패닉 상태에 빠져 이민과 유학의 문을 좁히고, 아프간 전쟁을 불사하고, 살벌한 보안 검색으로 많은 세계인들의 반감을 샀다.

군중의 분노 초래한 파리 테러사건

프랑스라고 다를까? 안 그래도 이슬람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뺏고 복지 혜택을 가져간다는 불만이 가득한데, 이번 테러는 근 800만명에 달하는 프랑스 내 무슬림들에게 엄청난 악재가 될 것이며, 동시에 반이슬람, 반이민자 성향의 극우파에게 막강한 힘을 실어줄 것이다. 자유와 관용을 베푼 대가로 테러가 돌아왔다면 여기에 대한 반응이 군중의 분노와 매서운 통제가 될 것은 거의 자명하다.

발전은 창조적 파괴에서 나온다. 새것이 옛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탁월한 국가일수록 과거를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게끔 격려하고 풀어주는 사회 제도를 갖고 있다. 아마 이것이 미국이 20세기 중반부터 유럽을 제치고 세계 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핵심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유럽은 자유와 도전을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 통제했지만 미국은 오히려 그것을 국가 발전의 핵심 역량으로 여겨 격려했다. 첨단 IT 벤처 사업들이 미국에서 처음 태동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자유로운 도전과 개방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적당한 자유와 혼란이 너무 극심해져선 안 된다. 마치 팬들의 열광이 있어야 게임은 열기가 붙지만 그것이 팬들의 난동으로 확대되면 게임 진행 자체가 불가능해져 버리는 것과 같다.

혼란이 파괴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혼란이 도를 넘어 창조적 발전 가능성을 짓눌러 버린 케이스가 바로 러시아다.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이 쇠퇴하던 혼란기는 역설적으로 모든 부분에서 러시아인들의 창의성이 엄청나게 표출되던 때였다.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 같은 위대한 작가들과 스트라빈스키와 차이콥스키 같은 대(大)작곡가들, 그리고 파블로프 같은 불멸의 과학자들이 쏟아져나왔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런 놀라운 창의성이 터지게 한 그 혼란이 러시아 혁명이라는 끔찍한 대혼돈으로 이어지면서 창의성은 사그라들고 말았다. 창조적 도약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질서는 유지돼야 하는데, 그것마저 없으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

당시 제정 러시아보다는 질서가 훨씬 엄하긴 해도 프랑스나 미국 같은 서구 선진국들이 현재 고민하고 있는 문제도 바로 이것이다.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한 혼란은 넘쳐나는데, 그것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질서는 너무 모자란다. 이건 남의 일이 아니다. 서구화되고 세계화되어 가는 우리나라에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개방화된 사회를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국가들에 앞으로 점점 심각하게 대두될 고민이 바로 통제와 자유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다.

사람과 정보가 끊임없이 오고 가는 이 세계화 시대에 어떻게 하면 혼란이 파괴로 이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자유이고, 어디까지가 질서인가? 어디까지 풀어주고, 어디까지 통제할 것인가? 어느 정도의 질서와 혼란이 적당히 공존해줘야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양자택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오직 기도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자만이 풀 수 있는 딜레마가 아닐까 한다.

한홍 새로운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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