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남도영] 빌 포드 의장과 정의선 부회장 기사의 사진
미국 자동차업체 포드의 빌 포드 이사회 의장은 2015 디트로이트 모터쇼 개막일인 지난 12일(현지시간) 타운홀 미팅 형식으로 진행된 포드의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첫 발언자로 등장했다. 연하늘색 정장 차림의 빌 포드 의장은 자동차 회사들이 추구해야 할 방향으로 ‘이동성(mobil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포드의 슈퍼카 GT도 소개했다. 그는 “자동차 메이커들은 앞으로 이동성에 중점을 둔 회사(mobility companies)가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포드 설립자 헨리 포드의 증손자인 빌 포드 의장은 전문경영인 체제가 정착된 미국에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포드 이사회는 2001년 빌 포드 의장에게 회사 CEO를 겸직해 달라고 요청했다. 실적 부진을 겪고 있던 포드의 경영을 위해 창업자의 증손자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작용했다고 한다. 헨리 포드 2세가 CEO에서 물러난 지 22년 만에 포드가의 적자인 빌 포드는 이사회 의장이자 CEO가 됐다. 그러나 빌 포드 의장 겸 CEO는 2006년 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실적 부진이 이유였다. 현재 포드의 CEO는 보잉 부사장 출신의 앨런 멀럴리에 이어 지난해 5월부터 포드에서 잔뼈가 굵은 마크 필즈가 맡고 있다.

현대자동차 정의선 부회장도 같은 날 디트로이트 모터쇼 현대차 부스에서 진행된 미디어 콘퍼런스에 발표자로 연단에 섰다. 정 부회장은 현대차가 그동안 미국에서 거둔 실적을 강조하고, 친환경차 개발 등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정 부회장은 이날 모터쇼 취재차 온 한국 기자들로부터 불편한 질문을 받아야 했다. 현대글로비스 지분 매각에 대한 질문이었다. 국내에서 정 부회장의 지분이 매각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온 직후였다. 정 부회장은 ‘글로비스 매각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에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겠다”고 답했다가,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승계를 위한 것인가’라는 거듭된 질문에 “승계보다는 지배구조 그런 쪽으로 이해해 달라”고 답했다. 승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지만 명확한 설명도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현대글로비스 지분 매각은 일단 무산됐다.

정 부회장이 ‘승계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기자들은 믿지 않는다. 근본적인 이유는 정 부회장이 현대차그룹의 후계자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어떤 방식으로든 정 부회장은 현대차그룹을 이어받을 것이고, 현대차그룹 내 지분이 거의 없는 정 부회장이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묘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땅콩 회항 사건이 터졌을 때 많은 이들이 조현아 전 부사장의 행태를 비판했다.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이 “그래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비판 여론의 소나기가 지난 어느 시점에 조 전 부사장은 다시 복귀할 것이고, 언젠가는 조 전 부사장을 포함한 자녀들이 대한항공을 포함한 한진그룹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결국 문제는 합리성이다. 회사에 도움이 된다면 창업자의 4세가 대표이사가 될 수 있고, 실적이 부진하면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게 합리적이다. 회사에 도움이 된다면 경쟁사의 CEO도 영입할 수 있는 게 자본주의다. 한국 경제와 기업의 특수성, 재벌 오너의 과감한 결정의 장점 등을 인정하더라도, 한국 기업들의 승계 과정은 비합리적이었다.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 국민들과 여론, 주주들이 재벌 후계자들에게 비전과 실적을 묻기 시작했다. 땅콩 회항 사건은 가을을 알린 낙엽 한 장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 구조가 재벌들의 승계 과정과 구도가 결국 공개될 수밖에 없는 투명성 정도는 갖추고 있다. 아마도 재벌 3, 4세대들은 아버지로부터의 검증 외에 주주들과 여론의 검증을 받아야 하는 첫 세대가 될 것이다. 어떤 후계자는 자신만만할 것이고, 어떤 후계자는 불안해할 것이다. 그게 합리적인 모습이다.

남도영 산업부 차장 dy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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