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윤정구] KPI(핵심성과지표)가 우리 회사를 죽인다 기사의 사진
요즈음 웬만한 회사는 다 KPI(Key Performance Indicator·핵심성과지표)를 가지고 전략적으로 성과를 측정하고 관리한다. 다양한 세미나를 통해 회사 임원진에게 회사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설정한 KPI가 역설적으로 회사 비전과 문화를 살해하는 주범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임원들은 내 말에 반신반의한다.

KPI가 설정되기 위해서는 먼저 회사 비전과 미션이 정해져야 한다. 이 미션과 비전을 최종 준거로 삼아 달성 과제들이 도출되고 이 과제들은 팀이나 개인 단위로 할당된다. 이 과제의 성공적 달성 여부를 판단해줄 수 있는 계량화된 지표가 KPI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KPI는 회사 비전과 미션을 달성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수단이다. 경영자들이 환호하는 이유가 비전과 전략을 달성한 정도를 숫자로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회사 비전과 미션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돼 일단 팀이나 개인에게 할당되는 순간 구성원들은 비전과 미션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할당된 KPI를 달성할 수 있는가가 최대 현안이 된다. 종업원들에게 KPI는 경영진이 생각하듯이 회사 비전과 미션을 달성하는 ‘수단’이 아니라 회사에서 자신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목적’이 돼버린다.

임원들은 전략적 차원에서 회사 비전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KPI를 설정하지만 실제로 달성에 참여하는 종업원들은 이 KPI가 안정된 회사생활을 보장해주는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임원들은 KPI를 비전 달성 수단이라고 생각해 할당하지만 그 비전을 위해 KPI를 달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종업원들은 없다. 종업원에게 회사 비전은 더 이상 중요한 고려대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라도 달성해 생존을 보장받는 것이다.

자신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목적으로 채용된 이 KPI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종업원들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자신의 생계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 수단과 방법은 가끔 조직이 설정한 비전과 미션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달성된다. KPI만 달성되면 비전과 미션이 구현된다고 믿고 있는 임원들도 KPI 달성 과정에서 비전과 미션이 침해받고 있는 것을 전혀 괘념하지 않는다. 이런 과정에서 회사 비전과 미션은 구성원 마음속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뿐인 플라스틱 비전 미션으로 전락한다. KPI의 압력이 더 세지면 세어질수록 점점 더 조직의 비전과 미션을 죽이는 방식으로 달성된다.

이 같은 현상은 이미 조직의 비전과 미션이 플라스틱 비전으로 죽어 있는 경우에 더 심각하게 나타난다. 어차피 허울뿐인 식물화된 비전 미션이기 때문에 KPI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조금 손상을 받아도 아무도 괘념치 않는다. 회사의 한 해 성과를 평가하는 자리에서도 회사 전체에서 달성된 KPI 숫자에만 관심을 쏟지 KPI가 비전과 미션을 얼마나 죽였는지는 관심이 없다. 경영진은 KPI 숫자만 달성되면 자동적으로 미션이나 비전이 살아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회사일수록 회사 문화는 점점 더 고사당하고 있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KPI를 강조하면 할수록 회사 문화는 확실하게 확인사살을 당하고 살아있는 문화가 없는 회사는 식물인간과 같은 상태로 변모한다.

경영환경이 급격하게 상생을 통한 공진화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신자유주의 경쟁원리를 기반으로 도입된 KPI가 우리 정서에 맞는 성과측정 도구인지를 심각하게 논의해봐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회사의 문화적 맥락이 무시된 상태에서 KPI의 집중은 오히려 장기적 성과를 내기 위한 체력을 소모시키는 주범이 되기 때문이다.

윤정구 이화여대 경영학 교수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