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칼럼] 정규직 양보가 비정규직 해법일까 기사의 사진
요즘 한국인들의 관심사는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원한 을’일 수밖에 없는 피고용인의 신세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나 보다. ‘추일서정’의 시인 김광균은 상업학교 출신의 회사원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며 느낀 고뇌를 ‘노신(魯迅)’이라는 시에 남겼다. “시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는다’는 것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숱한 굴욕을 참아낸다는 뜻이리라.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욕을 먹을 때도 있을 것이지만, 부당한 ‘갑질’을 당할 때도 많을 것이다. 때로는 ‘땅콩 회항’에서 보듯 범법행위를 포함한 부당한 지시까지 이행하도록 내몰릴 수도 있다. 한 일터 안에서, 그리고 일터 간에 무수한 ‘갑을’ 관계가 형성된다. 산업사회에서 노동이 결정되는 방식은 신분에서 계약으로 격상됐는데도 노동자의 곤경이 최근 들어 더 부각되는 것은 왜일까. 다른 나라들도 대개 마찬가지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 부의 집중과 2중 구조의 심화가 더 두드러지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이라는 제비뽑기에서 부자로 태어난 사람에게 시장이라는 고스톱 판은 좋은 패도 몰아준다. 그는 이길 확률이 당연히 높은데도 득점할 때마다 온갖 ‘따블’ ‘트리플’ 룰을 적용해 패자들의 돈을 죄다 긁어모아서 승자에게 몰아준다. 전두환정부 시절 유행한 ‘싹쓸이’ 고스톱이다. 고상하게 말하면 ‘승자독식’ 자본주의다. 싹쓸이 고스톱은 정통성 없는 정권에 대한 풍자이면서도 독재권력의 수립근거에 대한 대다수 국민의 승복과 내면화라는 씁쓸한 결과를 낳았다. 실제 그로부터 십수 년 후 우리 사회에서 패자부활의 기회나 개천에서 용이 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임금 격차가 커졌고, 비정규직이 늘어났다. 부는 개인에서 기업으로, 기업 간에도 더 큰 기업으로 집중됐다. 그 과정에서 불공정 거래와 차별은 고착화되고 있다.

정부는 근로자 소득이 높아져야 소비가 활성화된다면서도 ‘과보호’를 받고 있는 정규직이 임금과 고용 안정을 양보해야 비정규직 문제가 풀린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정규직의 임금이 유연해지고, 해고가 쉬워진다고 해서 비정규직의 처우가 저절로 개선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임금 격차와 노동시장의 2중 구조를 해소하기 위한 산별교섭 활성화 등 온갖 처방들은 대기업과 노조들이 한꺼번에 자기 몫을 구조적으로 양보하지 않는 한 무용지물이다. 큰 위기가 닥치지 않는 한 이는 불가능하다. 유력하고도 거의 유일한 대안은 취약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것이다. 취약 부문에 노조가 생기면 산업계 전반의 임금 격차는 줄어들 것이다. 노조는 착취와 차별, 그리고 갑의 부당한 지시에 대한 자율적인 견제장치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정부는 물론 전문가도, 노동조합도 이 대안은 말하지 않는다.

미조직 근로자들은 노조의 이기주의를 비난하지만 스스로 노조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는다. 기존 노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노조를 만들면 된다. 그러나 사용자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에 노조는 못 만들고, 같은 노동자끼리 손가락질을 한다. 정부는 1930년대 미국의 뉴딜 정책이 그랬듯 부당 노동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함으로써 10%에 불과한 노조 조직률을 높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노사관계 전공 교수들은 술자리에서는 노조 조직률 제고를 위한 사용자 엄벌을 거론하지만, 공식 석상에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누가 이들의 자기검열을 부추기나.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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