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김기석] 슬퍼할 수 있는 능력 기사의 사진
욕망의 전장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들려오는 파열음으로 귀가 먹먹하다. 폭력과 테러가 그치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 가슴에 든 멍은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주류세계에서 멀어질까 노심초사하며 성공의 사다리 윗단을 향해 치닫는 이들은 다른 이들의 사정을 헤아릴 여유가 없다. 상처투성이인 영혼에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흘러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모두가 바쁘고, 모두가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툭 건드리기만 하면 언제든 화를 낼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사는 것 같다.

나는 시간과 창조적으로 대면하며 살았던 릴케를 부러워한다. 그는 ‘기도 시집’을 열며 이렇게 노래한다. “지금 시간이 기울어가며 나를/ 맑은 금속성 울림으로 가볍게 톡 칩니다./ 나의 감각이 바르르 떱니다. 나는 느낍니다, 할 수 있음을/ 그리하여 나는 조형(造形)의 날을 손에 쥡니다.” 시간이 톡 치면 꽃이 피었다 지고, 달이 찼다 기울고, 물결이 일었다 스러지고, 사랑이 왔다 가기도 한다.

몸을 옹송그린 채 살아가는 나날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그렇게 창조적이거나 조화롭지 못하다. 조각난 시간에 찔린 상처가 깊다. 그 상처가 아물 새가 없다. 소중한 인격이 ‘몸값’으로 치환되는 세상에 적응하느라 사람들은 자신을 멋진 상품으로 포장하느라 여념이 없다. 휴식이나 여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무의미한 시간이 지속될 뿐이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무의미뿐이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이 조금도 그르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살풍경 앞에서 몸을 옹송그린 채 살아간다.

어린아이가 분노 조절을 못하는 교사에게 뺨을 맞고 쓰러지고, 이 땅에서의 삶에 멀미를 하던 한 청소년은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에 매혹을 느껴 자취를 감췄다. 서민들의 삶은 나날이 각박해지고 있는데 정부는 세수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서민들의 지갑을 기웃거린다. 이전투구를 거듭하는 정치인들은 상대를 흠집내기 위한 날 선 말을 가다듬는다. 역사의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종교는 하늘의 전망과 지평을 잃고 욕망의 뻘밭을 기느라 여념이 없다. 사람다운 삶의 길로 우리를 안내해야 할 종교적 언어는 상투어로 변한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상투어로 변한 말의 본래적 의미는 그 말을 체화한 이들의 존재를 통해서 회복된다.

울고 있는 사람들과 손 맞잡아야

많은 이들이 교황 프란치스코의 행보를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얼마 전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는 3만명의 젊은이들이 한 가톨릭 대학교 교정에 모여들었다. 교황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는 몇 해 전 집을 잃고 거리에서 살다가 지금은 교회가 제공한 숙소에서 사는 12살 소녀 글리젤레 팔로마도 참석하고 있었다. 소녀는 울먹이는 음성으로 교황에게 물었다. “많은 아이들이 마약과 성매매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왜 신은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지요?” 뜻밖의 질문 앞에서 프란치스코는 잠시 말을 잊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절절한 고통은 일체의 이론을 무력화하는 법이다. 눈물을 글썽이던 그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자신이 슬퍼할 줄 알고, 눈물 흘릴 줄 아는지.” 신의 정의를 묻는 질문에 그는 슬퍼하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으로 답했다. 폭력과 전쟁의 포자는 그 능력이 고갈된 곳에서 증식된다.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인생의 정답은 없다. 필요한 것은 답 없는 인생을 살아갈 용기이다. 부조리한 삶과 세상을 향해 ‘왜’라고 묻는 일도 필요하지만, 삶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에 창조적으로 답해야 한다. 지금 우리 눈앞에 물음표로 서 있는 사람들, 아니 울음표로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서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손을 맞잡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을 때 삶의 공포는 스러진다. 국정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지금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슬퍼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가족을 잃고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슬픔에 잠긴 이들에게 싸늘한 표정으로 ‘나도 할 만큼 다 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들 곁에 다가가 함께 울 수 있으면 좋겠다.

김기석 청파감리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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