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정태] 사법부 비리 대책 말뿐이었나 기사의 사진
①충격적인 비리 사건이 터진다→②위기감으로 인해 수뇌부 대책회의를 열고 여론을 살핀다→③일단 대국민 사과를 한다→④후속으로 비리 근절대책을 발표한다→⑤세월이 지나 여론이 잠잠해지면 유야무야된다.

법조비리 사건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9년 전인 2006년 ‘조관행 사건’의 흐름이 그랬다.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금품수수 비리로 구속되는 사법 사상 초유의 사건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검찰 소환 과정에서 사표가 수리돼 전직 판사로 수사를 받은 게 사법부 수뇌부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은 대국민 사과를 해야만 했고, 대법원은 비리 법관 재판업무 배제, 징계 후 사표 수리, 감찰 기능 강화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그 후 어떻게 됐을까. 법조브로커로부터 사건 청탁 대가로 1억원대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조 전 부장판사를 보자. 1심에서 징역 1년의 실형이 선고됐다가 항소심에서 1000만원 상당의 식탁과 소파를 받은 부분만 유죄로 인정돼 집행유예를 받은 뒤 대법원에서 확정된다. 이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면복권(2010년)돼 곧바로 변호사 자격을 되찾았는데 이게 하필이면 언론에 발각된다. 당초 자체 징계는 없었고 결과적으로 형사처벌도 없던 게 돼버렸으니 용두사미다.

법조비리 근절대책은 효과가 있었을까. 강도 높은 대책이라고 떠들었으나 일부를 제외하고는 상투적 구호에 불과했다. 판·검사들이 대거 연루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1990년대 후반 의정부 법조비리와 대전 법조비리 사건 때도 각종 방안이 나왔지만 실효성에 대해서는 항상 의문부호가 달렸다. 대책이 좀 더 구체화되는 수준이었지 땜질식 처방에선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니 고도로 지능화되고 있는 내부 비리를 막기에는 역부족일 터이다.

속이 썩어가고 있어서일까. 최근 수원지법 최민호 판사 구속 사태는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송두리째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경악스러운 일이다. 2009년 판사로 전직한 그는 검사 시절 알게 된 ‘명동 사채왕’으로부터 수억원의 뒷돈을 받은 혐의로 20일 구속됐다. 고도의 청렴성과 도덕성을 가져야 할 현직 법관이 쇠고랑을 찬 건 처음이라서 사법부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다. 9년 전과 마찬가지로 대법원은 긴급 대책회의 후 부랴부랴 대국민 사과를 했다. 별도 대책도 발표할 예정이다. 과거의 ‘반짝’ 흐름과 닮았다. 예전과 달리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징계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 게 조금 달라진 부분이다. 하지만 재판에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으면 면직된다는 점에서 징계 의미가 별로 없어 뒷북대응이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드러난 건 대법원의 감찰 기능이다. 뼈를 깎는 자기반성으로도 안 된다면 9년 전 대책대로 감찰 기능이라도 대폭 강화했어야 하는데 시스템이 별반 바뀌지 않은 듯하다. 지난해 4월 의혹이 제기된 뒤 윤리감사관실이 자체 조사에 착수했지만 어느 것 하나 밝혀내지 못했다. 본인의 거짓 해명과 자료만 믿고 재판업무에서도 배제하지 않았다. 강제수사권이 없어 한계가 있다는 게 대법원 해명이지만 비리 규명 의지가 없었던 건 아닌지 묻고 싶다. 21일 만난 하창우 대한변호사협회 신임 회장은 조사권을 가진 대법원 감찰부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검찰 수사권까지는 아니지만 금융자료 조회를 포함한 조사권 등을 제도적 장치로 구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법관징계법도 바뀌어야 한다. 지금은 가장 무거운 징계가 정직 1년에 불과하다. 솜방망이 징계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지난 17일 검찰 소환조사를 받은 ‘대학 후배 성추행 판사’도 중징계해야 한다. 관행대로 사표 내고 변호사 개업을 하는 식이면 곤란하다. 2011년 출근길 지하철에서 성추행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은 판사의 경우 사직서만 수리하지 않았던가. 비리가 적발될 때마다 엄벌해야 한다. 변호사 자격 박탈 등 법조계에서 영원히 퇴출시키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그래야 판사들이 경각심을 갖고 어둠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