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자작나무 숲에 여성들이 몰리는 까닭 기사의 사진
강원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자작나무 숲. 인제=구성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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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에는 모순적 이미지가 중첩돼 있다. 귀하고 이국적 나무로 느껴지지만, 실은 주변에서 정원수로도 흔히 볼 수 있다. 여성적이고, 날씬하다 못해 가냘프면서도 영하 80도의 추위를 견디는 강인함을 지녔다. 시베리아와 백두산을 상징하는 북방계 나무지만, 남한에서도 강원도 인제와 평창 등 강원산간지방에 부분적으로 자생한다. 평안도가 고향인 시인 백석은 1930년 여행한 함경도의 풍광을 자작나무를 통해 그려냈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 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보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백화(白樺)’)

지난 3일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자작나무 숲의 품에 안겼다. 겨울 자작나무 숲은 포근했다. 날씨가 비교적 따뜻했고, 지난달 중순 이후 눈마저 끊겨 쌓인 눈이 많이 녹은 덕분이었다. 138㏊(약 40만평)에 이르는 원대리 자작나무 조림지는 자작나무 군락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이고, 1991년부터 3∼4년간에 걸쳐 조성됐다.

입구의 자작나무 숲 안내소에서부터 비교적 넓은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초입부터 신갈나무, 물박달나무들 사이로 군데군데 자작나무 숲을 볼 수 있다. 원대리의 원대봉(해발 800m) 일대는 소나무와 활엽수들이 자생하는 곳이었으나 산림청은 소나무재선충이 크게 번지면서 죽어가는 소나무들을 베어내고 자작나무 4만 그루를 심었다. 처음엔 무슨 벌건 꼬챙이를 꽂아 놓은 듯했겠지만, 20여년이 흐른 지금 높이는 평균 20m, 가슴높이 지름이 평균 14㎝에 이를 정도로 컸다. 동행한 인제국유림관리소 송동현 주무관은 “높이로는 거의 다 자랐고, 이제는 더 굵어질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하얗게 빛나면서 매끈한 수피를 지닌 자작나무는 귀족적 이미지를 지녔다. 정비석은 기행수필 ‘산정무한’에서 금강산의 자작나무를 가리켜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공주(樹中公主)이던가”라고 읊었다. 암·수꽃이 피는 4월, 새순이 파릇파릇 돋는 5월 초, 연두색에서 노란색으로 단풍이 드는 10월 중순도 좋지만, 자작나무는 역시 흰 눈과 하나가 돼 푸른 하늘로 날카롭게 치솟는 겨울이 가장 좋다.

3.2㎞의 임도를 1시간 남짓 걸으니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에 도착했다. 25㏊에 이르는 이 조림 구역은 숲속 교실, 생태연못, 놀이터, 인디언 집 등 최소 단위의 시설을 갖췄다. 숲 한가운데 들어서니 사방에 흰 방한복에 스키를 신은 산악특수부대의 열병식을 보는 듯했다. 송씨는 “이곳이 계곡 습지라서 5∼6월경에는 큰앵초, 애기나리, 박새 등 야생화가 지천”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방문객은 11만5000명. 2012년 탐방 편의시설을 갖춘 이후 방문객은 매년 2배씩 늘고 있다.

우리나라 조림지는 일본잎갈나무(낙엽송), 잣나무, 삼나무 등 침엽수 위주였다. 산림청은 활엽수도 활용해 보자는 생각으로 재질이 단단한 자작나무를 선택했다. 하지만 자작나무는 40년을 자라야 목재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이런 저런 목적이 뚜렷했다기보다는 당시 정원수나 장식용으로 인기를 끌던 자작나무를 “그냥 한번” 심어본 것이었다고 한다. 박치수 인제국유림관리소장은 “자작나무 조림은 조림정책의 전환에 따른 것이었지만, 관광 명소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제국유림관리소는 2011년부터 관내 유치원들과 협약을 맺고 유아들에게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실시해 왔다. 여기에 참여한 학부모와 교사들이 글과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많을 때엔 주말 하루에 3000∼4000명이 몰리다 보니 폐해도 드러나고 있다. 사진작가들이 야생화를 훼손하고, 탐방객들이 ‘천년을 견딘다는’ 사랑의 편지를 쓰기 위해 자작나무 수피를 벗겨내거나 수피에 하트 모양과 이름 등 온갖 낙서를 한다. 2월 말∼3월 중순에는 자작나무 수액 채취가 기승을 부린다. 송씨는 “원대리 자작나무 숲도 결국 탐방예약제를 실시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내려가는 도중 동쪽에서 석양을 받은 설악산 귀때기청봉을 봤다. 해는 저물어가는데 한 모자(母子)가 올라가는 길을 재촉한다. 아마 입학이나 취업, 혹은 그 실패를 계기로 먼 데서 온 듯하다. 송씨는 “탐방객의 80%가 여성”이라고 말했다. 자작나무가 날씬한, 다이어트가 필요없는 미인의 아이콘 아닌가. 그들 중 상당수가 인생의 고비에서 생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오는 게 아닐까. 자작나무 숲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힘이 있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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