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신창호] 할 말 하는 박근혜식 외교? 기사의 사진
2013년 11월 6일 영국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이곳의 낡은 타운하우스 2층집은 영국이 의회민주주의 정체를 확립한 이래 총리 관저로 사용해 온 유서 깊은 곳이다. 벽돌과 작은 현관, 좁은 나무계단과 벽난로를 가진 고택(古宅)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마주했다.

정상회담 전 이른바 ‘오프닝 스피치(opening speech)’시간이었다. 먼저 캐머런 총리가 격식을 갖춘 연설을 했다. 5분을 넘지 않았다. 말하는 내내 그는 박 대통령을 쳐다봤다. 다음은 박 대통령 차례. 한국말로 15분가량 연설했다. 양국 통상협력 및 우방관계, 대북 공조, 북핵 반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등이 다 들어 있었다. 박 대통령은 캐머런 총리를 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청와대 풀기자로 갔던 필자는 영국 총리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표정은 5분이 넘자 굳어졌다. 10분을 넘기면서는 박 대통령을 쳐다봤다. 캐머런 총리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정상외교에서 오프닝 스피치는 최대한 짧게, 상대방과 같은 분량으로 하는 게 관례다.

같은 해 5월 7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한·미 정상회담의 오프닝 스피치도 박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보다 길게 했다. 너무 길어지자 오바마 대통령은 “이제 그만 백악관 뜰을 산책하시죠”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언제든 할 말을 다 한다. 외국정상과의 만남뿐 아니라 해당 국가에 대해서도 그렇다. ‘아베 신조호(號) 일본’에 대해 행했던 박 대통령의 직설화법은 수도 없다. 북한과 관련해선 취임 이전부터 그랬다. 첫 한·미 정상회담에선 미국이 예상치 못했던 ‘서울 프로세스(동북아평화협력구상)’를 제기하며 오바마 대통령의 지지를 요청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답했다. 아주 외교적인 언사였다. 아마도 내심(內心)은 “어, 아직 잘 모르겠는데…”가 아니었을까 싶다.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대한민국 외교에서 ‘성공’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 있는 상대국은 중국 정도다. ‘할 말 다하는’ 우리에게 중국 정부가 호응해줘서다. 그런데 그 할 말도 중국에 대해서가 아니라 일본에 대해서였다. ‘제국주의 일본’의 피해자인 두 나라의 동질성이 교감한 셈이다.

국가 대 국가의 외교는 항상 냉정한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강자도, 약자도, 두 국가가 비슷한 경우도 있다. 어쨌든 각자 자국 이익을 추구해 얼마나 많은 걸 얻어내느냐가 관건이다. 때로는 외교관이 비굴해지는 이유가 있다. 한번 비굴해져 내 나라의 이득을 더 얻어낼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진짜’ 외교관이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상한가였던 ‘박근혜식 외교’가 요즘 삐걱거린다. 첫 접촉 시도부터 ‘격(格) 논쟁’을 일으켰지만, 북한은 대화나 민간교류 제의를 다 거부하고 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전폭 지지한다던 미국은 정작 남북대화 국면이 조성되자 잇따른 대북강경책으로 찬물을 끼얹었다. 그뿐 아니다. 서울 프로세스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더니 되레 일본의 집단자위권 확보 움직임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일본이야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과거사 반성을 촉구해도 그들은 그들만의 길을 갈 뿐이다.

박근혜정부에는 주옥같은 대외·대북 전략이 있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서울 프로세스·드레스덴 선언·‘통일대박’ 구상 등등이다. 조금 지나면 임기 반환점을 도는데 아무것도 된 것이 없다. ‘아무리 좋은 구슬도 꿰어야 보배’란 옛말이 있다. 언제 구슬을 꿸 것인가. 할 말 다하는 것보다 어떻게 실천할지를 고민해야 하겠다.

신창호 정치부 차장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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