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국교정상화 50년] “실망·체념 늘고 있다… 정부 차원서 풀어라” 기사의 사진
"한·일 양국에서 과거사 문제 해결이나 양국 관계 회복이 가능하다고 보는 믿음이나 세력들이 약화되고 있는 것 같다." '지일파(知日派)' 소설가 한수산씨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즘 일본 지인들을 보면, 그동안 한·일 문제에 대해 우호적이라고 할까,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 한국과 시각을 같이했다고 할까, 그런 사람들이 입장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도저히 실마리가 보이지 않으니까. 안 되는 걸 가지고 이제껏 매달렸던 거 아닌가, 이건 정말 안 되는 일이구나, 그런 얘기들도 흘러나온다."

◇꼬여만 가는 관계… 실망, 피로, 체념=아사히신문 주필을 지낸 와카미야 요시부미 동서대 석좌교수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한·일 관계에 대해서 체념 비슷한 것, 즉 피로감 같은 것이 일본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어느 정도 타협을 하면서 해결해 나가면 되는데, 양쪽 정부가 체면이나 극단적인 여론만 보고 있는 것 같다”면서 “너무 강한 목소리들만 나오니까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 지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지일파, 지한파(知韓派)로 알려진 한·일 양국의 여러 인사들과 통화를 시도했다. 대부분 말을 아꼈다.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꼬여만 가는 한·일 관계에 대해 체념하는 분위기가 묻어났다.

‘아베 신조의 일본’(2014년) ‘우경화하는 신의 나라’(2006년) 등의 책을 쓴 노다니엘씨는 일본에 거주하며 일본을 연구하는 한국인 학자다. 교토산업대 객원연구원 신분인 그는 “한·일 양국의 동질성에 대해 기쁨이나 반가움을 느끼며 두 나라 관계에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이 두 나라의 심리체계나 행동양식이 굉장히 다르다는 걸 알고 실망하게 되었다”면서 “이들이 반한이나 혐한으로 돌아섰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뭐랄까 한국에 대한 기대감이나 친근감을 버리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졌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노씨는 과거사 사죄 문제를 예로 들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의 언어체계에서 “통절히 느낀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표현이고 극진하게 사과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왜 사과를 화끈하게 못하냐고 비판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진심 어린’ 사과를 다시 요구하게 되고, 일본은 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과를 해야 되고, 얼마나 더 사과를 해야 되느냐고 불만이다. 노씨는 “서로에 대해 잘 모르니까 사과를 해도 마음에 다가오지 않는 것 같다”며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대화의 장, 대화의 시도 자체를 바람직하지 않게 보는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된다”고 말했다.

오랜 기간 일본의 정치권 및 시민단체와 연대 활동을 펼쳐온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는 “일본 시민사회의 변화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일본의 정치권은 확실히 달라졌다”고 진단한다. 그는 “과거에는 민주당에 ‘전후보상을 생각하는 의원연맹’ 같은 게 있어서 한국과 함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베 정권 이후 급속도로 보수화되면서 일본 정치권에서 반성의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한·일 관계의 달라진 조건…‘잃어버린 25년’을 넘어서=한·일 양국에서 재일조선인 문제와 한·일 관계를 다룬 중요한 책들을 여러 권 출간한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는 최근 ‘잃어버린 25년’(가제)이란 제목의 평론집을 쓰고 있다. 그가 말하는 ‘잃어버린 25년’이란 경제적 개념이 아니다. 1989년 히로히토 일왕 사후 현재에 이르는 시간대에 진행된 일본의 우경화를 의미한다.

서 교수는 “이 기간에 일본 사회는 그때까지 미약하나마 존재하고 있던 민주주의적 요소, 보편적 가치관을 잃어버리는 길을 걸었다”며 장기침체, 격차사회의 심화, 중국과 한국의 발전, 대지진과 원전사고 등으로 “다수 일본 국민들이 자신감 상실에 빠지게 되었고, 그것이 내향적 자기중심주의를 강화하는 작용을 했다”고 그 이유를 분석했다.

노씨도 “전후 일본 학계는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학자들이 주류를 이뤘지만 지금은 한국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우파들이 주류가 되었다”며 “안타깝고 위험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지난 25년간 한·일 관계의 조건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 시기 일본은 장기침체를 겪으며 우경화했고, 한국과 중국은 눈부시게 성장하면서 민족주의를 강화했다. 중국의 부상과 한·중 관계의 변화는 한·일 두 나라를 양자관계가 아니라 다자관계로 재편성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세대의 변화다. 노씨는 “한국은 경제성장과 정치민주화를 달성했기 때문에 40대 이하 젊은층의 경우 자부심이 굉장히 강하고 일본에 대한 열등감이 없다”며 “그러다보니 더 당당하게 일본을 윤리적으로 재단하고 비판하게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반면 일본에서는 전후 민주주의 세대가 퇴조했고, 그들이 가졌던 반성적 역사의식은 후세대로 계승되지 못했다. 윤 대표는 “일본에서 우리와 함께 과거사 운동을 시작했던 분들은 연세가 많이 드셨다”면서 “역사교육의 부재, 미디어의 비보도, 이익 중심의 가치관 등으로 일본 젊은 세대는 역사문제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문제… “한·일 관계가 중요하다는 시그널 필요”== 지금의 한·일 관계가 정상적이라고 보는 이들은 없었다. 두 나라 정상이 만나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라는 지적이 많았다. 또 비정상 상태를 해소할 당사자가 양국 정부라는데도 이견이 없었다.

와카미야 교수는 “국민들은 많이 접근했다”며 “정부가 좀 더 양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산케이신문 기자를 기소하고, 일본 정부는 신사 참배와 망언을 한다”면서 “중간에서 성찰과 화해를 말하기가 곤란한 상황이 자꾸 벌어진다”고 지적했다.

노씨는 “상황이 어렵지만 한국이 한·일 관계를 중요하다고 보고 미래지향적으로 인식하고 있구나, 그런 사인이나 시그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중요한 때 주한 일본대사관이 전혀 안 보인다”며 의원 외교나 주일 대사관의 역할도 주문했다.

권혁태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지금 문제는 한·일 관계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이라며 “방향도 없고 철학도 없다. 우리 정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윤 대표는 오는 8월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아베 담화’를 언급하면서 “엉터리 담화가 나오면 한·일 관계가 진흙탕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다. 우리 정부가 미리 손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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