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日帝에 항거 독립투사들… 두만강 넘어 첫 임시정부 세워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① 항일운동의 시발점 연해주를 가다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日帝에 항거 독립투사들… 두만강 넘어 첫 임시정부 세워 기사의 사진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시(市) 외곽 꽁꽁 얼어붙은 수이푼 강변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 유허비에는 각각 한국어와 러시아어로 고인의 삶을 요약한 글귀가 적혀 있다.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2015년은 광복 70주년이자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지 70년이 되는 해다. 지난 100여년 동안 한국교회가 걸어온 길은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의 궤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였고 분단 이후에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국민일보와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이사장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민족이 걸어온 고난의 역사와 한국교회의 활약상을 돌아보고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과제를 다루는 특별기획 프로젝트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를 연재한다. 총 4부에 걸쳐 게재되는 연간 대기획 특집 기사다.

취재진은 음력으로 광복 70주년이 시작되는 설 연휴인 지난 18∼20일 러시아 연해주를 방문했다. 초창기 항일운동의 성지였던 지역이다. 이곳은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시작인 고려인이 처음 정착했던 곳이기도 하다. 취재진은 연해주 독립운동 유적지 곳곳을 돌아보았고 수많은 고려인들을 만나 이들의 인생 역정을 취재했다. 국민일보는 앞으로 미국 중국 일본 독일 네덜란드 등지도 방문해 한국 근현대사의 명암을 재조명할 계획이다. 평화통일을 향한 한국교회의 역할도 제시한다.

러시아 연해주를 관통하는 수이푼강은 꽁꽁 얼어 있었다. 이곳이 독립운동가 이상설(1870∼1917) 선생의 유해가 뿌려진 유적지란 사실을 알려주는 건 강가의 유허비(遺墟碑)가 유일했다. 2001년 10월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선생의 삶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었다.

유허비에는 고인의 삶을 요약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연해주에서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조국독립운동에 헌신 중 순국하다. 그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를 이곳 수이푼 강물에 뿌리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고종의 밀사(密使)로 파견된 선생은 하나님의 뜻을 좇는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17년 연해주에서 병사했다. 숨을 거둘 때 동지들에게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현장에 동행한 A선교사(58)는 “이상설 선생은 유허비라도 세워져 있지만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유적지 중엔 방치돼 있는 곳도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연해주만큼 한민족의 희로애락이 응집된 땅도 없을 것”이라며 “무엇보다 이곳은 독립운동의 출발지였다”고 강조했다.

취재진은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 앞에서 묵념을 한 뒤 강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강물이 꽁꽁 얼어 있어 물길이 어느 곳으로 흘러가는지 가늠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이었다.

피어린 항일운동의 출발지

한국 근현대사에서 연해주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이곳에서 발흥한 항일운동의 스토리를 확인하려면 우선 19세기 중엽 연해주에 정착한 고려인에 대해 알아야 한다. 고려인의 역사는 함북 경원에 살던 13가족 60여명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한 마을에 정착하면서 시작됐다. 가난과 조선왕조의 폭정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하는 사람은 꾸준히 늘어 1880년대 중반엔 3만명을 넘어섰다. 이주민이 늘면서 20세기 초반 연해주는 독립투쟁의 중심지가 됐다. 연해주 의병이 1907∼1908년 일본군과 벌인 전투만 1700차례가 넘는다. 당시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한 고려인은 연인원 10만명에 달했다.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가 세워진 곳도 연해주였다.

연해주가 초창기 항일운동의 거점이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인접해 있는 데다 중국 등지에 비해 일제의 간섭과 탄압이 덜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구국계몽운동에 참여하던 애국지사의 연해주 망명이 줄을 이은 건 불문가지다. 특히 크리스천 애국지사의 망명이 두드러졌다. 연해주는 이상설 선생을 비롯해 초창기 독립운동의 대부로 통하는 최재형(1858∼1920) 선생, 전도사이기도 했던 이동휘(1872∼1935) 선생의 활동 무대였다.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1879∼1910) 의사 역시 연해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처럼 연해주가 독립운동의 기지가 되자 일본은 위기감을 느꼈다. 결국 1920년 4∼5월 연해주 고려인 300여명을 무차별 학살한 이른바 ‘4월 참변’을 일으켰다. 참변 이후 연해주 항일운동 세력은 크게 약화됐다.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만주 등지로 거점을 옮겼다. 4월 참변의 흔적은 우수리스크 시내의 한 기념물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6m 높이의 추모비였다. 차들이 내달리는 도로변에 위치한 추모비에는 누군가가 놓고 간 카네이션 8송이가 놓여 있었다.

취재에 동행한 소강석(53) 목사는 묵념을 한 뒤 “연해주에는 한민족의 정신과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서려 있다”며 “연해주 애국지사들의 활동을 재조명하는 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연해주의 독립운동 유적지는 1990년대 이후 꾸준히 발굴돼 왔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 대한 우리 사회나 교계의 관심은 부족한 게 사실이다. 2박3일간 수많은 유적지를 방문했지만 한국인을 만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연해주 유적지를 탐방한 한국인의 흔적은 우수리스크 시내에 있는 ‘고려인 역사관’을 방문했을 때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 방명록엔 연해주 방문 소감이 빼꼭하게 적혀 있었다. ‘고난의 역사 당당하게 맞선 선열들의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독립을 위한 투쟁의 정신을 현재의 삶 속에 품고 가겠습니다.’

연해주, 한민족 공동체의 미래

과거 항일운동의 성지였던 연해주는 현재 다양한 궤적을 그리며 살아온 한민족이 공존하는 지역으로 거듭났다. 이곳엔 현재 고려인을 비롯해 남한이나 북한에서 건너온 사람들, 일거리를 찾아 국경을 넘어온 조선족이 공존하고 있다.

연해주가 한민족의 미래 식량 문제나 에너지 문제 해결의 발판이 될 것이라는 목소리도 많다. '통일 코리아'를 이야기할 때 연해주를 빠뜨려선 안 되는 이유다.

원로 언론인으로 고려인 통사(痛史)인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2013)을 집필한 김호준(70)씨는 "연해주는 역사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온 한민족이 함께 살고 있는 한민족 공동체의 실험지대"라고 규정했다. 이어 "한민족이 시베리아 대륙, 나아가 유럽으로 갈 수 있는 길목이 연해주"라며 "앞으로 한민족의 해외 개발과 생활공간 확대에 있어 최적의 후보지"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관심은 미미하다. 연해주 복음화도 미진한 편이다. 최관흘(1877∼?) 선교사가 파송된 것이 1909년이니 한국 교계의 연해주 선교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하지만 복음화 수준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우수리스크의 경우 3만명 넘는 고려인이 살고 있지만 크리스천 고려인은 500여명밖에 안 된다.

이상규 고신대 신학과 교수는 "한국 교계는 광복 70주년을 맞은 올해부터라도 연해주 지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연해주와 이곳 고려인 동포들이 한반도와 대륙을 잇는 복음의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해주(러시아)=글·사진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