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변호사 된 정진섭 前 국회의원 환갑 넘어 딸 친구뻘과 경쟁… “기숙사 틀어박혀 책만 팠죠” 기사의 사진
정진섭 변호사는 “사법연수원에서 교수와 동료 원생들이 ‘고문님’이라 부르며 잘 대해줘 2년간의 힘든 공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는 “업무를 빨리 익혀 국회의원들이 만드는 법률이 민생 현장에서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싶다”고 말했다. 곽경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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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에서 법조인으로 옷을 갈아입은 63세 변호사는 달변이었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 있었다. 참 건강하다는 느낌을 줬다. 2년간의 사법연수원 과정을 수료하고 지난달 초 대형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가 된 정진섭 전 국회의원에 대한 첫 인상이다. 인터뷰 약속을 하고 서울 남대문로 한진빌딩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은 것은 지난달 26일 오후. 2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며 늦깎이 변호사가 된 경위를 자세히 물어봤다.

정 변호사는 1981년 사법시험(23회)에서 1, 2차에 합격했으나 3차 면접에서 학생운동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떨어졌다. 26년이 지난 2007년 법무부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의 불합격 처분 취소조치 권고를 받아들임에 따라 사법시험 합격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때는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었다. 17, 18대 의원을 지낸 그는 2013년 3월 사법연수원에 입소해 지난 1월 수료증을 받아 당당히 변호사가 됐다. 사법연수원 최고령 수료 기록을 세웠다.

-사시 면접 때 얘기 좀 해 주시죠. 어떻게 학생운동 경력이 불합격 사유가 되는지요.

“예나 지금이나 사법시험이 권위를 인정받는 것은 성적에 따라 엄정하게 합격자를 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독 5공 정권이 막 들어선 81년 그해는 면접을 강화해 국가관을 본다면서 2차 필기시험에서 10%를 더 뽑았습니다. 300명을 뽑을 계획이면서 330명을 뽑은 거죠. 저는 75년 유신반대 시위와 ‘80년 봄’ 때 포고령 위반으로 두 차례나 대학에서 제적된 적이 있어 그것이 탈락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지요. 불합격된 후 면접에 참여한 교수님들로부터 ‘올해는 학생운동한 사람은 안 뽑았다고 하더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많이 억울했겠습니다.

“이듬해 면접에서도 같은 이유로 떨어진 뒤 나름대로 정보 수집을 하고, 문서 공개를 요구하고, 소송까지 제기했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87년 6·29선언 이후 제기한 민사소송에선 대학 동기인 천정배 변호사가 무료 변론까지 해줬으나 소용없었어요. 노무현정부 때 법무부 장관이 된 천 변호사가 내 문제에 신경을 썼으나 물적 증거를 찾지 못해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런데 2007년에는 어떻게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까.

“그야말로 하나님 뜻이었지요. 81년 사법시험 당시 보안사 처장(대령)으로 일했던 분이 우연한 기회에 저와 같은 이유로 불합격된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에게 관련 서류를 챙겨줬습니다. 한 교수로부터 서류를 넘겨받은 진화위가 당시 면접관들을 만나 조사한 결과 진실을 밝혀낸 것이지요. 조사관들이 시험 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로 면접관이었던 이수성 전 국무총리에게까지 확인을 받아냈다고 합디다. 결국 진화위가 법무부에 ‘합격처리’ 권고를 했으며, 저는 그해 49회 사법시험 면접에 응해 합격증을 받았습니다.”

그때 한인섭 서울대 교수, 신상한 전 산업은행 감사실장, 조일래 전 한국은행 법규실장, 박연재 전 KBS 광주총국장, 황인구 전 SK가스 자원개발본부장도 함께 혜택을 받았다. 이 가운데 신 전 실장, 조 전 실장, 박 전 총국장은 앞서 연수 과정을 마치고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학업 부담이 엄청나게 큰 것으로 소문난 사법연수원에 들어갈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로 예상치 못한 합격증을 받았으나 그때는 17대 의원 시절이었고, 2008년 18대 총선 때 한 번 더 당선됐으나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는 공천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걸 계기로 정치 미련을 떨쳐버리고 제 지역구였던 경기도 광주 시민들에게 변호사가 되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요. 환갑이 넘어 딸 같은 친구들과 함께 연수원을 다녀야 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가족과 친구들이 법 공부를 잘 마칠 수 있도록 기도 많이 해줬습니다.”



-국회의원까지 지냈으니 연수원 생활은 대충 한 것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법연수원 생활은 사법시험 때와 마찬가지로 오직 성적으로 승부합니다. 평가도 엄정합니다. 집에서 통학하는 연수생이 있고 인근 오피스텔에서 생활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집(경기도 광주)이 멀어 기숙사를 택했습니다. 연수원 후반기 시보 시절을 제외하고는 1년 반을 기숙사에서 보냈습니다. 저는 도서관보다 기숙사에 틀어박혀 공부하는 타입이었어요. 그야말로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는 공부만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인근 일산 호수공원에서 한 시간 정도 운동을 했습니다. 돌아와 식사하고 세면한 뒤 강의 준비하고, 수업과 시험으로 낮시간을 보낸 뒤 밤에는 12시까지 공부했습니다. 신문과 TV는 일절 보지 않았습니다. 볼 시간도 없었고요.”



-연수원 생활 중 어떤 게 가장 힘들었습니까.

“빨래하는 것도 금방 적응했고, 일상생활은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연수원 원장과 교수, 동료 원생들이 ‘고문님’(자치회)이라 부르며 잘 대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양쪽 엄지손가락에 퇴행성관절염이 와 고생 좀 했습니다. 연수원에선 모든 시험을 수기(手記)로 하기 때문에 손가락에 부담이 많이 갑니다. 한꺼번에 30∼40페이지를 써야 하니 그럴 수밖에요. 연수원에선 오른손을 다치면 휴학을 하는데 저는 용케 견뎌냈습니다.”

-아들 딸처럼 젊은 연수원생들과 경쟁하려면 많이 힘들었을 텐데 암기는 잘 되었습니까. 수료 때 성적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흔히 공부는 궁둥이, 머리, 가슴 등 세 가지로 한다지요. 저의 경우 책상에 앉아있는 데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머리와 가슴의 경우 의정활동 등 다양한 인생 경험을 한 것이 사회 현상을 구조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모든 시험이 상대평가여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크게 뒤지지는 않았습니다. 성적은 상·중·하 세 그룹으로 나눈다면 하에 속했지만 하 중에서는 상위권이었습니다.”



-광주시민들에게 변호사가 되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는데 왜 대형 로펌을 택했습니까.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으로서 고향에서 소소한 형사사건 등을 맡는 것도 봉사하는 방법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국회의원들이 만드는 각종 법률들이 현장에서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걸 위해서는 로펌이 낫겠다 싶어 지원했는데 고맙게도 흔쾌히 받아주었습니다. 연수원 성적으로는 도저히 올 수 없는 자리입니다. 나중에 고향에 가서 낮은 자세로 시민들을 돕는 기회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지 한 달이 채 안 됩니다만 혹시 사건 수임한 것 있습니까.

“아직 하진 못했는데 4건 정도를 상담 중입니다. 수임이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의외로 법률적 행위를 하면서 문서화를 하지 않는 바람에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증거를 보강토록 해 수임하기 위한 준비는 하고 있습니다.”



-어떤 법조인이 되고 싶은지 20대 고시공부 할 때와 지금 차이가 있습니까.

“고시공부 할 때는 판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와서 판사는 하고 싶어도 못 하니까 변호사로서 국가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을 맡아 일해보고자 합니다. 국민을 위해 만든 법률이 잘못 적용되고 있는 점을 발견할 경우 정책 목표에 맞춰 바로잡을 수 있도록 입법 의견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성기철 논설위원 kcs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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