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일제 탄압·강제 이주… 고향 잃었던 이스라엘 백성과 비슷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② 연해주 고려인, 한민족 디아스포라 시작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일제 탄압·강제 이주… 고향 잃었던 이스라엘 백성과 비슷 기사의 사진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사는 고려인들이 설날 연휴 첫날이던 지난달 18일 시내 외곽 한 식당에 모여 설날 잔치를 열고 있다. 고려인 대다수는 한국 방문 경험조차 없는 노인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내 마음의 고향은 한국”이라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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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구비의 생김새나 얼굴에 깊게 팬 주름은 한국의 어르신들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언어는 요령부득이었다. 식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벽안의 러시아인처럼 러시아어로 노래했고 러시아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이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미아(迷兒)로 통하는 고려인들이었다.

식당은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시(市) 외곽에 있었다. 식당을 찾은 날짜는 음력으로 광복 70주년이 시작되는 설 연휴 첫날인 지난달 18일. 이곳에선 고려인 노인 200여명이 참가한 설날 잔치가 한창이었다. 행사는 러시아어로 진행됐지만 상에 차려진 음식은 이들의 뿌리가 한국에 닿아 있음을 실감케 했다. 식탁엔 된장국 콩나물무침 떡 김치 만두 같은 한국음식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러시아어로만 진행되던 잔치 분위기가 반전된 건 취재에 동행한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소강석(53) 목사가 마이크를 잡으면서부터였다. 그는 “설 명절에 연해주에서 혈육을 만나 가슴이 벅차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아리랑’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하모니카 연주를 듣던 고려인들은 음악이 클라이맥스로 치닫자 하나둘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소 목사의 연주는 한 차례 더 반복됐고 식당에는 아리랑 노래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질곡의 삶을 딛고 일어선 고려인들

우수리스크 고려인들의 설날 잔치는 1956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올해로 60회를 맞은 셈이다. 이곳 고려인노인회 회장인 윤슬라바(78)씨는 “전통을 잊지 않기 위해 잔치를 연다”고 말했다.

“러시아어로 말하고 노래하지만 저희의 고향은 한국입니다. 같은 민족을 만나면 가슴이 저립니다. 올해가 광복 70주년인 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광복은 민족의 큰 승리였으니까요.”

함경북도 출신인 윤씨는 1956년 아버지를 따라 탈북해 60년 가까이 연해주에서 살았다. 하지만 이날 만난 고려인 대다수는 윤씨와 달랐다. 조부모나 부모를 따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가 10∼20년 전 연해주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인생 역정은 고려인의 수난사, 그 자체였다.

연해주에 한민족이 정착하기 시작한 건 1863년 함북 경원에 살던 13가족 60여명이 이주하면서부터다. 빈곤과 압제를 피해 연해주로 이주하는 사람은 꾸준히 늘어 19세기 말엽엔 러시아인보다 고려인이 더 많이 살게 되었다. 고려인 정착마을만 30곳이 넘었을 정도다.

근현대사에서 고려인을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시작으로 여기는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고려인의 역사는 미국 하와이 농업이민(1902년)보다 39년 앞선다. 연해주가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면서 일제는 눈엣가시였던 연해주 독립투사들을 제거하기 위해 고려인을 심하게 탄압했다.

하지만 이러한 수난은 국가 테러리즘의 극치로 불리는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 사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소련은 고려인들을 화물열차에 태워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등지로 이주시켰다. 이유는 간단했다. 연해주에 일본인과 외모가 흡사한 고려인이 대거 살다 보니 국경을 넘어온 일본 첩자를 가려내는 게 어렵다는 것이었다. 당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은 17만명이 넘었다. 이들 중 많은 고려인들이 이주 과정에서 추위와 배고픔, 질병 등으로 숨졌다.

취재진은 설날이던 지난달 19일 고려인 강제이주 열차의 출발점이었던 라즈돌노예 기차역을 찾아갔다. 기차역 플랫폼엔 혹한의 칼바람만 불고 있었다. 고려인의 아픈 역사를 되새길 수 있는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78년 전 라즈돌노예역을 출발한 기차는 시베리아 대륙을 6000㎞ 넘게 가로질러 사고무친의 땅인 중앙아시아 벌판에 고려인들을 내려놓았다.

현장에 동행한 한국인 선교사 A씨(58)는 “화물열차에 실려 한 달 넘게 시베리아의 추위를 견디다가 중앙아시아 벌판에 내팽개쳐진 선조들을 생각할 때면 숙연해진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고려인의 삶이 고향을 잃고 유배의 시간을 보낸 성경 속 이스라엘 백성과 비슷하지 않냐”고 되물었다.

이날 찾아간 우수리스크 시내의 ‘고려인 역사관’에서는 당시 아픈 역사를 보여 주는 사진 한 장이 전시돼 있었다.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 벌판에서 추위를 견디기 위해 땅을 파 지은 ‘땅굴 집’ 사진이었다. 전시물 상단에 적힌 사진 제목은 ‘중앙아시아 벌판에 버려진 사람들’이었다.

이튿날 방문한 블라디보스토크시(市)의 한 언덕에는 신한촌(新韓村)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신한촌은 고려인들이 강제이주 되기 전에 살던 연해주 지역의 대표적인 고려인 마을이었다. 1999년 세워진 비석 뒷면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50만 한민족의 근원지이며 마음의 고향’이라고 써 있었다. 이곳은 많은 고려인에게 오랜 기간 망향(望鄕)의 마을이었던 셈이다.

“고려인 문제에 큰 관심 가져야”

고려인의 굴곡진 인생 역정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미하일 고르바초프(84)가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오르며 페레스트로이카(개혁)·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표방하면서부터다. 소련 고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고려인의 역사는 수면 위로 부상했다.

고려인 사회 역시 1990년 한·소 수교, 이듬해 소련 연방 해체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소련 연방에서 분리된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등은 러시아어가 아닌 토착 언어를 국가공용어로 선포했다. 러시아에만 익숙하던 고려인은 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들은 1990년대부터 ‘마음의 고향’인 연해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현재 연해주에는 5만명 넘는 고려인이 살고 있으며 이중 3만여명은 우수리스크에 거주한다. 우수리스크에는 한국 선교사가 세운 교회가 7곳 있지만 복음화율은 미미하다. 크리스천은 3만여명 중 500여명 수준이다.

원로 언론인 김호준(70)씨는 저서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2013) 머리말에 이렇게 적었다. ‘세계 각지의 한인 동포치고 고난과 시련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지만 고려인에 비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려인과 악수해 보면 지식인, 노동자 가릴 것 없이 두텁고 거친 손을 갖고 있다.’

김씨는 국민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고려인은 700만 재외동포의 원조”라고 규정했다. 그는 “한민족에게 고려인은 21세기를 함께 열어갈 대륙 진출의 인도자”라며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이 고려인의 손을 잡아준다면 그들은 성공신화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연해주(러시아)=글·사진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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