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유랑의 운명 자식세대까지 “힘든 시절 하나님이 전부였다”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③ 연해주 크리스천 고려인을 만나다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유랑의 운명 자식세대까지 “힘든 시절 하나님이 전부였다” 기사의 사진
지난달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시에서 만난 최나제즈다 할머니, 박앙겔리나씨, 허안드레씨(왼쪽 사진부터). 각각 고려인 2·3·4세인 이들은 크리스천 비율이 미미한 고려인 사회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은 "많은 고려인들이 하나님을 영접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시인 김윤배(71)는 시집 ‘시베리아의 침묵’(2013) 들머리에 적은 ‘시인의 말’을 통해 1863년 빈곤과 폭정을 피해 두만강을 건넌 고려인의 ‘기원’을 이렇게 쓰고 있다. ‘연해주는 헐벗은 유민들에게 희망의 땅이었다. 조국이 그들을 거두지 않았으므로 연해주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하지만 고려인에게 연해주는 ‘희망의 땅’이 될 수 없었다. 절망과 치욕의 땅이었다. 고려인들은 일제의 폭압을 견뎌야 했고, 1937년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짓궂은 유랑의 운명은 자식 세대까지 이어졌다. 91년 소련(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자 고려인이 살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은 러시아어 대신 토착 언어를 국가공용어로 선포했다. 러시아어에만 익숙한 고려인들은 사업이나 자녀교육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려인 중 일부는 연해주로 귀환했다.

취재진은 음력으로 광복 70주년이 시작되던 설날 연휴인 지난달 18∼20일 연해주를 방문해 많은 고려인들을 만났다. 이들 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는 크리스천도 있었다. 크리스천 고려인들에게 복음은 신산한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준 버팀목이자 희망의 끈이었다.

고려인 2세 할머니의 인생 역정…“나에게는 하나님이 전부였다”

최나제즈다 할머니는 우수리스크시(市) 고려인 사회에서 ‘역사 선생님’으로 통한다. 고려인의 수난사와 러시아의 역사를 속속들이 알고 있어 붙은 별명이다. 실제로 그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시(市) 한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으며 젊은 시절엔 알마티의 한 고등학교에서 소련 역사를 가르쳤다.

하지만 기억력이 뛰어난 할머니도 모르는 게 있었다. 80대라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자신의 나이가 정확히 몇 살인지 몰랐다. 부모님이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됐기에 출생 이력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서툰 한국어로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연해주에 살다가 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했습니다.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지요.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조선 사람을 차별했습니다. 고아원에도 들여보내주지 않더군요. 결국 어릴 때는 노숙을 하며 살았습니다. 다행히 사회주의 국가여서 돈이 없어도 대학엔 갈 수 있더군요.”

사고무친의 땅에서 할머니가 의지할 데는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는 특별한 계기도 없이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다. 할머니는 “힘든 시절, 하나님은 나에게 전부였다”며 미소를 지었다.

“고아인 저에게 하나님은 아빠이자 엄마였습니다(웃음). 힘든 유년기를 보냈지만 하나님을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하나님은 저에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행복을 주셨습니다.”

할머니의 삶이 안정되기 시작한 건 20대에 접어들면서부터다. 그는 주경야독하며 교사의 꿈을 좇았다. 여섯 살 많은 고려인 남자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부부는 딸 둘을 낳아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살았다.

할머니가 가족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한 건 94년이었다. 연해주로 귀환한 이유를 묻자 그는 “여기가 내 고향이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할머니는 연해주로 돌아온 뒤 한국도 자주 방문했다. 한국교회의 초청을 받거나 연해주 한인 선교사들이 동행을 제안해 지금까지 총 여섯 차례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은 저에게 굉장히 자랑스러운 나라입니다.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르지만 훗날 확인한 어머니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딸아, 네 고향은 경주다. 너는 경주 최씨다.’ 제가 평생 한국을 잊을 수 없었던 건 ‘나는 경주 최씨’라는 생각을 자주 했기 때문입니다(웃음).”

크리스천 고려인들이 말하는 한국, 그리고 신앙

2박3일간 만난 많은 고려인들은 한국을 가깝지만 먼 나라로 여기고 있었다. 이들에게 한반도는 조부모나 부모가 살던 고향일 뿐이었다. 고려인 대다수는 한국어도 전혀 못했다.

하지만 우수리스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고려인 3세 박앙겔리나(52·여)씨는 달랐다. 한국어가 제법 유창했다. 박씨는 “2003년 경기도 안산의 한 무역회사에서 3개월간 일하며 한국어를 익혔다”면서 “한국생활을 할 때 한국 드라마를 즐겨봤다. 그러다 보니 금방 한국어가 늘었다”고 설명했다.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시(市)에서 나고 자란 박씨는 2000년에 남편(59)과 딸(32), 아들(29)을 데리고 연해주로 이주했다. 시장에서 야채나 과일을 팔아 생활비를 벌다가 지난해 식당을 개업했다.

“우즈베키스탄 언어(우즈베크어)를 모르니 우즈베키스탄을 떠날 수밖에 없더군요. 처음 연해주에 왔을 때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하지만 한 한국인 선교사의 전도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었지요. 하나님의 축복이 없었다면 연해주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박씨의 경우 한국생활을 했기에 한국을 친숙한 나라로 여겼지만 20∼40대 고려인들에게 한국은 낯선 나라였다. 허안드레(38)씨는 “러시아와 한국이 축구시합을 하면 젊은 고려인 상당수는 러시아를 응원할 것”이라고 전했다. 우즈베키스탄 우르겐치시(市)에 살다 2010년에 연해주로 이주한 허씨는 한국 방문 경험이 없었고 한국어 실력도 일천했다. 인터뷰는 박씨의 도움 덕분에 가능했다.

한국과 유리된 삶을 살아온 허씨가 또래 고려인들보다 한국을 친숙하게 여기는 건 신앙 때문이었다. 그는 스무 살 때 한국인 선교사가 우즈베키스탄에 세운 교회에 다니며 처음 복음을 접했다. 10대 때 동갑내기 고려인 여성과 결혼한 허씨에겐 딸(22)도 있는데, 복음화가 미미한 고려인 사회에서 이들 가족은 전부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휴대전화 회사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연해주에 오니 일자리가 없더군요. 어쩔 수 없이 아내와 시장에서 반찬가게를 운영하게 됐지요. 힘든 시절을 겪었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셨기에 모든 걸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많은 고려인들이 하나님을 믿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신 존재니까요.”

연해주(러시아)=글·사진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