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항일운동 선봉에서 민족 일깨우고 고난 속 부흥 씨앗 뿌려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④ 3·1운동과 한국교회의 수난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항일운동 선봉에서 민족 일깨우고 고난 속 부흥 씨앗 뿌려 기사의 사진
이창섭 고신역사기념관 담당 팀장이 17일 충남 천안 고려신학대학원에 있는 기념관 전시실에서 일본 경찰이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기독교인을 고문하는 마네킹을 보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천안=박재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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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의 고신역사기념관 입구에는 각각 100㎏이 넘는 녹슨 종 2개가 양쪽에 놓여 있다. 왼쪽은 경남 진주의 장날이었던 1919년 3월 18일, 다섯 동네로 3·1만세운동이 확산되도록 알렸던 진주교회의 종이다. 오른쪽은 교회에 대한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던 1938년 초, 경남 마산의 제일신마산교회 집사가 자신의 집 마당에 묻어뒀던 교회 종이다. 당시 일제는 전쟁무기를 만들기 위해 교회 종을 비롯해 각종 쇠붙이를 싹쓸이해 갔다.

130년 한국교회사에서 이들 교회 종이 지닌 의미는 매우 상징적이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앞장서서 민중을 일깨웠던 교회의 외침인 동시에 역경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려 했던 변하지 않는 울림이기도 하다.

◇‘교회 부흥의 씨앗’ 된 3·1운동=‘한민족의 비폭력 독립운동’으로 일컫는 3·1운동의 구심점에는 교회가 있었다. 박용규 총신대 교수가 지은 한국기독교회사(생명의말씀사) 등에 따르면 당시 서울·평양·진남포·원산·개성·안주·정주·선천 등 첫 만세운동 장소는 대부분 교회였다.

특히 평양과 선천에서는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길선주(평양 장대현교회) 신홍식(평양 남산현교회) 양전백(선천읍교회) 목사 등이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일본기독교사’를 쓴 도히 아키오는 당시 조선의 기독교에 대해 “대단히 강력했으며 민족종교와도 같은 힘을 지녔다. 지식인이나 민중 깊숙이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통계상으로도 3·1운동에 참여했던 한국교회의 활약상을 확인할 수 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 등에 따르면 3·1운동과 관련한 기소자 총 7835명(3월 1일∼5월 27일) 가운데 기독교인은 1719명(21.9%)이었고, 천도교인은 1207명(15.4%)이었다. 같은 기간 9059명의 수형자 가운데 기독교인은 2032명(22.4%), 천도교인은 1363명(15.0%)이었다. 당시 인구 1600만명 가운데 기독교인의 비율은 1.8%(29만명)에 불과했지만 천도교인의 비율은 6.3%로 100만명(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법정진술)에 달했다. 한국교회의 3·1운동 참여가 얼마나 두드러졌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3·1운동에 대한 역사신학자들의 평가는 어떨까. 박용규 총신대 교수는 “3·1운동 이후 기독교에 대한 일반인들의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다”면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미국 북장로교 출신의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영문 기독 잡지에 남긴 글에서 “3·1운동은 교회를 근절(根絶)시키기보다 오히려 새로운 성장기로 접어들도록 인도했다”고 회고했다.

◇역경 속에서 영근 신앙=1943년 12월 25일 성탄절, 황해도 장연의 동부교회에서는 여운원 목사의 설교가 이어지고 있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여 목사가 이 말을 꺼내자마자 갑자기 예배당 뒤쪽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기미 다마렛(야, 너 닥쳐)!” 이어 일본 경찰 2명이 구둣발로 단상에 뛰어올라 여 목사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끌고 나갔다. 당시 아홉 살이었던 민경배(81) 백석대 석좌교수의 목격담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국교회에 대한 일제의 핍박이 본격화됐다. 당시 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암살미수 사건을 조작한 ‘105인 사건’(1911)이 대표적이다. 당시 기소자 123명 중 기독교인만 98명이었고, 이 사건을 거치면서 장로교인 수가 1911년 14만4261명에서 이듬해 12만7228명으로 약 13.4%(1만7000명) 감소하는 등 타격이 컸다.

경기도 화성 제암리교회 학살사건(1919)을 비롯해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긴 암흑기를 맞았다. 가장 극심한 고통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였다. 특히 1930년대 중반부터 광복 직전까지가 ‘절정기’였다.

이 기간에만 기독교인 2000여명이 투옥됐고, 40여명이 옥사했다. 교회는 200곳 넘게 문을 닫았고, 각종 집회는 감시를 받거나 해산되는 등 일제에 의해 통제를 당했다. 성경 일부와 특정 찬송 사용도 금지됐다. 급기야 1938년 9월 장로교는 제27회 정기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면서 한국교회 분열의 씨앗을 낳기도 했다.

“천조대신(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의 신)이 높은가 하나님이 높은가.”(일본 헌병)

“천조는 사람이 만든 신이고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 비교할 수 없소.”(조수옥 권사)

지난 17일 들른 고신역사기념관 전시실에서는 신사참배 거부 성도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일본 헌병과 조 권사 간 취조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이창섭 고신역사기념관 담당 팀장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일사각오의 믿음으로 신앙을 지킨 선배들이 있었다”면서 “오늘날 한국교회 부흥의 바탕에는 그들의 순교 신앙이 있었다”고 말했다.

◇“순교 신앙, 믿음의 후대로 계승해야”=고난과 핍박의 역사를 건너온 교회는 반드시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고 역사신학자들은 강조한다. 이상규 고신대 교수는 “일제시대 교회의 탄압은 복음의 확산을 가져왔고, 교회를 정화시켰으며, 신앙과 믿음의 깊이를 더했다”면서 “이는 한국 기독교의 자생력을 강화시켰고 해방 후에는 교회 성장의 초석이 됐다”고 분석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 성장의 씨앗이다’라는 2세기 서방교회 지도자였던 테르툴리아누스의 고백과도 일맥상통한다.

민 교수는 “역경을 견디면서 신앙을 지켰던 선대의 강인한 신앙을 믿음의 후손들에게 계승해야 할 책임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면서 “일제 탄압의 ‘출애굽 교회’를 지나온 한국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실천하며 교회의 본질 회복에 힘쓰는 ‘신명기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움말 주신 분들=민경배(백석대 석좌) 박용규(총신대) 박명수(서울신학대) 이상규(고신대) 임희국(장신대) 교수

천안=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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