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김종걸]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는 사회…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 더 많은 기회 줘야 기사의 사진
가난은 하늘이 만들지 않았다. 가난을 만든 것은 사람이다. 근대의 경제성장은 자연 제약으로부터 인류의 풍요로움을 확보하는 과정이었다. 모두 다 풍요로울 수 있는 사회. 그러나 부끄럽게도 세상엔 여전히 빈곤이 넘쳐난다. 후진국 이야기가 아니다. 뉴욕 런던 서울의 한가운데 가난과 격차는 여전히 우리가 잡아야 할 중요한 화두다.

한국은 경제적 성장과 평등을 동시에 이룩한 나라로 칭송받았다. 1993년에 출판된 세계은행의 유명한 보고서 ‘동아시아 기적’의 결론이 그랬다. 그러나 2013년 한국의 절대적 빈곤율은 11.7%, 상대적 빈곤율은 16.7%,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최상위권이다. 일부 식자들은 경제가 성장하면 좋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때로는 낙수효과를, 때로는 쿠츠네츠(Kutznet) 가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실증연구들은 이 모두를 부정한다.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경제성장과는 상관없이 빈곤과 격차가 확대되고 고정되며, 결국 세대 간에 대물림되는 현실이다.

과거 시카고 대학의 한 강의실에서 자유시장의 신봉자였던 밀턴 프리드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흑인이 못사는 이유는 그들이 젊었을 때 공부하지 않고 놀 것을 선택한 ‘자유’의 결과라고. 그때 한 흑인학생이 손을 들어 말했다. “프리드먼 교수님, 저에게 부모를 선택할 ‘자유’가 있었나요?” 일본의 저명한 경제학자 우자와 히로부미(宇澤博文)가 같은 시기 시카고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을 때의 증언이다.

누구나 부모를 선택할 자유는 없다. 가난한 학생들이 고액의 명품강의를 들을 ‘자유’도, 영어연수를 떠날 ‘자유’도 없다. 출세를 위해 부모의 인맥을 활용할 ‘자유’도, 내 집 마련과 부모봉양에 휘어 재테크에 전념할 ‘자유’도 없다. 출발점이 다르며 결과도 다르다. 그래서 출발점의 차이는 대를 이어 계승된다.

자유시장이 모두의 기회를 확대할 것이라는 믿음도 참 순진한 일이다. 시장은 불안정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불공정하다.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불평등의 대가’라는 저서에서 집요하게 지적했던 것이다. 지금의 정치시스템이 시장의 실패를 제대로 시정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폴 크루그먼이 ‘자유주의자의 양심’이라는 책에서 누누이 강조했던 사항이다. 이미 시장에서 충분히 독점화되어 있는데도 더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약간의 복지 확대를 퍼주기식 무상복지라고 비난하는 것을 보면 한국은 두 노벨경제학 수상자가 통렬히 비판했던 미국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민주국가의 기본원리는 누구나 평등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고 배웠다. 기회의 평등이 바로 공정함의 기초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은 부와 지위와 능력이 대물림되는 신분제사회로 변화한다. 시정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좀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정치철학자 존 롤즈가 ‘최소 수혜자의 최우선 배분의 원칙’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복지의 총량을 확대하고 가난한 자의 능력을 높이는 것, 그것이 정의로운 일이며 결과적으로도 좋은 경제적 성과로 귀결된다는 연구는 얼마든지 댈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능력이다. 복지예산이 부족하다면 늘려야 하며 세금이 부족하다면 걷어야 한다. 작금의 무상급식 논란에서 “학교는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라는 ‘재담’이 회자되는 현실, 퍼주기식 공짜복지라는 구호가 횡행하는 현실은 가난한 자에 대한 한국사회의 공감능력 부재를 말해준다. 그것이 미래 한국을 우울하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헛헛한 것도 사실이다.

김종걸(한양대 교수·국제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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