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기독교 가치 ‘자유와 해방’ 실천… 민족 위해 십자가 졌다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⑤ 항일 투쟁 앞장선 믿음의 선조들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기독교 가치 ‘자유와 해방’ 실천… 민족 위해 십자가 졌다 기사의 사진
지난 19일 서울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앞에서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가 배재학당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 배재학당 동관은 서울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됐다. 강민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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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성취(德器成就) 지능계발(智能啓發)’.

서울 중구 서소문로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의 정면 오른쪽 모서리에 있는 대리석 머릿돌에 새겨진 글이다. 1916년 정초식 때 새겨진 여덟 자는 일제 강점기에 배재의 교육 이념이 무엇이었는지 증언하고 있다. 현관 지붕 아래 현판에는 배재학당의 학당훈인 ‘욕위대자(欲爲大子) 당위인역(當爲人役)’이 검은 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돼라”(마 20:26)는 뜻이다. 1886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1858∼1902)가 열었던 배재학당의 당시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지난 19일 서울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앞에서 만난 이덕주(63) 감리교신학대 교수는 “아펜젤러는 섬기는 리더십을 강조했고 그러한 인재를 양성했다”며 “배재학당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 시인 김소월, 소설가 나도향 외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고 설명했다.

◇서울 도심의 독립운동 현장=이날 서울 도심 한국교회 독립운동의 현장을 동행 취재한 이 교수는 한국교회사를 전공한 중견 신학자다. 그는 “한국 기독교는 한마디로 일제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민족과 함께 한 종교였다”고 규정했다.

“한국 기독교는 선교 초기부터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었어요.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기독교인들은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보였죠. 이것이 기독교 부흥과 성장의 원동력이었습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에서 정동제일교회를 지나 5분쯤 걷자 이화학당 정문이 보였다. 전통 한옥의 솟을대문 형식으로 세워진 정문은 그윽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정문 앞에는 유적지에서나 볼 법한 석비가 하나 있었다. 이 교수는 “조선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 놓았던 석비인 하마비(下馬碑)”라고 설명했다. 이화학당을 설립한 미국 북감리교 소속 여선교사 메리 스크랜턴(1832∼1909)은 고위층이나 집 앞에 둘 수 있던 하마비를 교문 앞에 두어 당시 차별받던 여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줬다고 한다. 이 교수는 “자존감을 회복한 여학생들은 3·1운동 때 교사들이 말려도 나라를 위해 밖으로 뛰쳐나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됐다”고 전했다.

최초의 근대식 사립 여성 교육기관이었던 이화학당을 기념한 이화박물관에선 한국 근대사를 장식한 걸출한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선교사 집 하인의 딸이었지만 한국인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에스더, 청상과부로 승려가 되려다 스크랜턴을 만나 첫 한국인 이화학당 교사가 된 이드루실라(이경숙) 등은 모두 이화학당에서 배출한 인재다.

이화학당 맞은편에는 대한제국 시기의 건물인 ‘중명전’이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다. 을사늑약 체결 전에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로버트 매클레이(1824∼1907)와 미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호라스 알렌(1858∼1932) 등이 머물렀던 곳이다.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 체결 후인 1907년 이곳에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헤이그 특사로 파견했다. 특히 이준 열사는 서울 상동교회와 연동교회에 출석했던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태화복지재단을 거쳐 서울기독교청년회관(YMCA)을 찾았다. 이곳에선 일제 강점기 최고의 화가였던 이당 김은호의 작품 ‘부활후’를 감상할 수 있었다. 모나리자처럼 다양한 표정이 연상되는 예수의 모습에서 깊은 평안이 느껴졌다. 1926년 조선총독부 주최 미술전람회에서 ‘부활 후’로 3등에 오른 이당은 YMCA에 이 작품을 기증했다. 원본은 6·25전쟁 때 소실됐지만 이당은 64년 이 작품을 다시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교수는 “절망과 좌절의 시대에 부활하신 예수를 그린 것은 조선총독부를 향한 또 다른 저항이었다”면서 “이 작품에는 우리 민족의 부활을 뜻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항일 민족운동 앞장선 한국교회=1905년 일제가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했을 때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초창기에 복음을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은 성경과 기독교 전통 속에서 복음의 궁극적 실천 강령으로 ‘자유와 해방’을 발견했다. 기독교인들은 자연스럽게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대한 저항의식을 갖게 됐고, 구국기도회에서부터 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형의 항일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서북지방의 많은 기독교인이 극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은 국내외에서 계속됐다. 이는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던 1919년 3·1운동으로 이어진다.

◇이념을 초월한 단일 민족운동 단체 ‘신간회’=1920년대 중반 국내외에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기독교와 사회주의운동 세력들이 갈등과 마찰을 빚고 있을 때 이들을 하나로 묶어낸 것도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YMCA 총무를 역임한 원로 지도자 이상재(1850∼1927)는 1927년 2월 이념과 사상, 종교를 초월한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를 만들었다. 신간회는 항일운동 단체들 간 반목과 갈등을 접고 하나로 뭉쳐 민족의 자주독립을 추구했다. 기독교 민족운동가들도 민족주의 좌파 계열 몫으로 신간회에 대거 참여했는데, 회장으로 선출된 이상재와 연희전문 교수 출신인 조병옥 등이 주축으로 활동했다.

신간회의 자매단체격인 ‘근우회’는 신간회보다 3개월 늦은 1927년 5월 창설됐다.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반봉건주의의 민족운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신간회와 같지만 여기에 ‘여성해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추가한 것이 다르다. 근우회도 사회주의 계열인 여성동우회와 기독교여자청년회(YWCA)를 중심으로 기독교 여성운동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들은 3·1운동 때 애국부인회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이들과 3·1운동 후 조직된 기독교여자청년회, 기독교여자절제회 등 초교파 여성운동 단체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두 단체는 민족저항운동 세력의 연합과 연대를 경계한 일제 경찰에 의해 4년 만에 해체됐다. 이 교수는 “신간회와 근우회는 3·1운동 이후 민족의 자주독립을 ‘시대적 명제’로 인식한 그리스도인들이 이념이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연대했던 ‘공동 투쟁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했다.

김아영 기자 cello08@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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