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칼럼] 노랑 리본 기사의 사진
얼마 전 희귀본을 열람하러 서울의 한 대학도서관에 갔다가 나오는데 때 이른 개나리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보니 개나리가 아니라 줄에 일렬로 달려 있는 노랑리본이다. 세월호 참사 1주년이다. 그때의 충격과 다짐은 유별났지만 별다른 결실 없이 대학가의 리본만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당시 많은 사람들이 카카오톡에 노랑리본을 내걸었었다. 한여름의 칡넝쿨처럼 뻗어가던 카톡은 감청 논란이 헤살을 놓고 끼어들면서 숙지근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남아 있는 700여명의 주소록을 찾아보니 ‘never ending story’라는 표제를 내건 언론계 친구와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라는 크리스천 등 두 명이 노랑리본을 달고 있다.

청년들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생각뿐이에요. 남을 배려한다거나, 그런 건 사치라고 생각해요.” 청년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 달라진 자신들의 생각을 그렇게 말했다.

어떤 결사(結社)가 있었던 것도 아니란다. 세월호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보면서 서로들 그런 생각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무엇이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바라보고 ‘경제가 좋아지는’ 나라의 청년들을 제 앞가림만 하도록, 아니 제 이익만 따지며 살도록 만든 것인가. 그들은 말했다. “세월호 문제가 제대로 처리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요? 우리나라의 일인데도 프란치스코 교황만큼 희생자 가족들을 진심으로 만나준 사람이 있었나요? 우리 또래들은 조금도 기대하지 않아요.”

내가 잘 살려면 남들도 잘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은 윗세대들의 생각이며, 자신들은 1등만이 살아남는 엄청난 경쟁의 압박을 받으며 성장했고, 그런 경쟁에서 이긴 소수의 정규직들도 저축이 불가능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또 그들은 세월호 참사 당시 주먹밥과 라면을 나르던 인정 많은 사람들을 화나게 만든 사회에 무슨 연대(連帶)와 공동체의 희망이 있느냐고 물었다.

사회학자들은 세월호 사태를 6·25전쟁 이후 가장 비극적인 참사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일을 겪고도 희생자 가족들을 끌어안지 못했다면, 그래서 그들이 사회의 어떤 계층으로부터 떼거지 집단이라는 눈총을 받는다면 이건 무지하게 심각한 문제다. 희생자들이 하루 빨리 자신의 자리에서 서도록 도와주는 것이 민주사회의 기본적인 도리다. 그들의 주장이 거슬린다고 그들을 내치고 가는 정치와 선거는 골백번 이기더라도 사회의 병리현상을 깊게 만드는 패배일 수밖에 없다.

이 나라의 모든 사람은 대형 여객선이 뒤집혀 그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 침수되는 것을 생방송으로 보았고, 끝내는 한 사람도 살려내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에 살난스러워지고 말았다. 이 참사는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한 두 개의 사실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여객선 침몰이라는 재난이고, 다른 하나는 침몰 후 보여준 국가적 대혼란이다. 전자가 사고였다면, 후자는 리더십의 문제다. 전자는 예방하기 어려웠다고 하더라도 후자는 리더십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였다.

각 집단과 개인의 이해관계와 기대 수준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진 나라에서 각 계층을 골고루 만족시킬 수 있는 리더십은 웅숭깊은 마음에서라야 나올 것이다. 누구라도 무시하지 않고 들어줄 수 있는 겸양, 서신 한 줄이라도 존중해서 읽고 답장을 보내줄 수 있는 정성, 시사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소책자라도 버리지 않고 읽어보는 관심. 매양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은 어떤 혼란 앞에서도 빠르게 일어나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선한 친구. 그는 누구인가.

임순만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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