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금연금주·물산장려운동, 민족정기 살리고 민중들 자각시켜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⑥ ‘나라와 민족의 희망’ 전령사로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금연금주·물산장려운동, 민족정기 살리고 민중들 자각시켜 기사의 사진
1920년대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가 주도한 금주·구습타파 가두행진의 모습.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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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안에서 1년간 소비되는 술값이 8342만9170원이외다. 우리 민족 한 사람의 생활비가 1년간 200원이라고 가정하면 41만7145명의 생활비가 됩니다. 1년간만 술을 먹지 않는다면 생활난에 빠진 형제를 5년간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술을 마시겠습니까?’

1927년 11월 16일자 기독신보에 실린 ‘금주 선전’의 한 부분이다.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가 작성한 이 글은 일제 강점기 무기력했던 한국인들의 무절제한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총독부는 술문화를 조장하거나 방조했다. 당시 술과 담배 판매로 걷은 세금이 조선총독부 전체 세입의 30%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공창제를 도입하겠다며 50만 달러를 들여 한반도 전역에 홍등가를 설치했다. 2년 뒤에는 18만2000달러를 투입해 아편 재배도 추진했다.

총신대 박용규 교수는 ‘한국기독교회사’에서 “일제가 한국인들의 도덕성 해체 작업에 착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벌인 금주·금연 등 절제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은 민족정기를 되살리는 시민운동이자 일상에서 벌인 독립운동이었다.

◇민족정기 되살린 기독교의 절제운동=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민족 지도자들은 국채보상운동의 하나로 금주·금연 등 대대적 절제운동을 전개했다. 고신대 이상규 교수는 1일 “교계를 중심으로 벌인 금주단연운동(禁酒斷煙運動)은 단순히 건강이나 신앙상의 이유에 따른 것이 아니라 민족운동과 관련된 것이었다”면서 “금주·단연함으로써 절약한 재화로 외채를 청산하자는 취지였기에 그 결과와 관계없이 정신적 측면에서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1911년에는 주한 선교사들이 기독교절제회를 조직해 1년 동안 금주·단연·순결에 관한 문서를 제작해 배포했다. 1912년에는 평양, 황해도 황주 등지를 중심으로 계연회가 조직됐고 점차 전국으로 확대됐다. 계연회는 담배를 끊는 운동과 이를 통해 절약한 돈으로 외지에 전도인을 파송하는 전도운동을 겸했다. 교회 주일학교 공과책에도 절제 관련 내용이 포함됐다. 1922년에는 만국금주회 총무 린을팅 부인과 프린스턴신학교 윌슨 교수가 각각 5일간 서울 평양 등지에서 금주 강연을 했다.

절제운동은 1923년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에서 선교사인 틴링 여사를 6개월간 파송하면서 교단들이 본격 참여하는 등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감리교는 그해 지역별로 금주회를 조직하고 매년 12월 셋째 주일을 금주 선전일로 정했다. 장로교는 1926년 공창폐지 운동을 결의했다. 구세군은 기관지 ‘구세공보’를 금주호로 특별 제작해 배포했다.

1924년 8월 이화학당에서 조직된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는 1928년까지 전국 52개 지회, 3000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하면서 전국적인 절제운동을 벌였다. 감리교도 1930년부터 각 연회에 절제부를 두어 이 운동을 총괄했다. 감리교는 감리교인 임배세가 작사한 절제 계몽가 ‘금주가’를 1931년 ‘신정 찬송가’에 포함시켰고, 1933년 공포한 ‘사회신경’에 “심신을 폐망하게 하는 주초와 아편의 제조·판매·사용 금지”라는 조항을 넣었다. 장로교는 음주뿐 아니라 누룩의 제조·판매를 금지하는 문제를 교단 총회에서 논의했다.

기독교여자절제회는 현재 서울 용산구 후암로에 본부를 두고 절제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 30일 만난 기독교여자절제회 권순연 총무는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준 애국애족의 정신은 기독교여자절제회 사역의 원동력”이라며 “한국사회 ‘중독’ 문제의 심각성과 위험성을 알려 다음세대가 성결하고 건강한 삶을 살도록 매년 금주·금연·마약퇴치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규 교수는 “기독교의 금주·금연과 절제운동은 식민시대 한국인의 시민 의식을 키우는 발판이 됐다”고 평가했다.

◇물산장려운동, 에큐메니컬 운동의 전형=3·1운동 후 지식인들과 대지주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물산장려운동이 전개됐다. 1923년 새해 첫날 함흥시내에서 YMCA 회원 1000여명이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가두행진을 하며 조선 물품을 사자고 외쳤고, 평양에서는 짧은 두루마기 등 개량 한복을 보급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조선물산장려회 궐기문에서 “피가 있고 눈물이 있는 형제자매들아, 우리가 서로 붙잡고 서로 의지하여 살고서 볼 일이다.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써라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이라고 호소했다.

장신대 임희국 교수는 “조선물산장려운동은 1920년 고당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 지도자들과 자작회(自作會)가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인대회를 가진 데서 시작됐다”며 “나라 잃은 민중들의 자각과 스스로의 힘을 바탕으로 민의 자치와 협력을 통해 주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물산장려운동을 “시민 스스로의 힘으로 펼친 비폭력 독립운동”이라고 평가했다.

평양의 경우 물산장려운동에 기독교계, 상공업계, 교육계는 물론이고 동우구락부, 대한국민회 등 민족운동 및 항일 비밀결사 단체의 핵심 인사들도 참여했다. 한국YMCA 생명평화센터 이윤희 사무국장은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한 평양YMCA는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며 “지역사회 현안은 물론 개인 대소사, 각종 민원 상담이 이뤄지는 동네 사랑방 같았는데, 이 같은 활동은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 에큐메니컬 정신을 구현한 평양 교계의 지도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이 중 대표적 지도자는 조만식이었다. 경북대 정태식 교수는 ‘한국기독교와 역사’에서 “평양YMCA 초대 총무였던 조만식은 기독교인이었지만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등 다양한 이념을 포용했고 이념이 다른 이들과 함께 운동을 전개했다”면서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도 성공적인 시민운동을 이루려면 조만식이 보여준 것처럼 각기 다른 이해관계와 이념의 차이, 그로 인한 배타성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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