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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년 전 ‘미션로드’를 따르다… 내일 오후 3시, 아펜젤러 부부·언더우드 제물포에 첫발 디딘 날

130년 전 ‘미션로드’를 따르다… 내일 오후 3시, 아펜젤러 부부·언더우드 제물포에 첫발 디딘 날 기사의 사진
인재를 키우고 목숨을 살린 선교사들이 남긴 흔적들. 왼쪽부터 언더우드 목사가 세운 고아학당과 1900∼1910년대 돈의문(서대문) 모습,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이 세운 이화학당 초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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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그들은 왜 목숨을 걸고 조선 땅에 왔을까.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그날. 바로 130년 전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후 3시. 한국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1858∼1902) 부부와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1859∼1916)가 제물포항에 첫발을 디뎠다.

당시 조선은 신변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곳이었다. 갑신정변이 난 지 불과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더우드, 아펜젤러 부부 등 한국 선교단은 위험을 무릅쓰고 한반도로 향했다. 1885년 2월 3일 미국의 태평양 우편선인 아라빅호(Arabic)를 타고 조선을 향해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다. 이어 15일 선상에서 예배를 드린 뒤 12일 뒤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일본에 도착한 선교단은 로버트 매클레이(Robert S Maclay) 선교사를 만나서 조선 선교에 대한 치밀한 전략을 수립했다.

마침내 3월 23일 요코하마항에서 미쓰비시(三菱) 선박회사의 증기선 나고야마루호를 타고 대망의 조선 입국을 감행했다. 미쓰비시 기선회사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조선으로 출항하는 증기선이 있었는데 이 배를 탔다. 7일 뒤 세이리오마루호로 배를 바꿔 탄 뒤 4월 2일 0시30분 부산항에 닻을 내렸다. 잠시 상륙해 동네를 둘러본 일행은 선상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제물포로 향했다.

이 땅의 문화를 송두리째 바꾸는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2015년은 두 선교사가 한국 땅에 들어온 지 130주년이 되는 의미 깊은 해다. 특히 5일은 그 해와 같은 부활주일이다. 이 상서로운 해에 그들의 제물포 입항이 어떤 경위로 이루어졌는지를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와의 가상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해 보았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남긴 일기 등의 자료와 국내 한국교회사 연구가들의 증언, 기타 국내외에서 발간된 책자 등의 자료를 토대로 그들이 제물포항에 들어온 역사적 의의를 되짚어 봤다.

-두 분이 조선 땅에 오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나.

△아펜젤러=한국의 감리교 선교에 대한 계획은 민영익을 비롯한 방미 사절단 일행이 1883년 감리교 목사 존 가우처(John F Goucher)를 우연히 만나면서부터 시작됐다. 가우처는 은둔의 나라 조선에 복음을 전파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즉시 2000달러를 선교 기금으로 희사했다. 가우처의 물심양면 지원에 힘입어 미 감리교 총회선교위원회는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한국 답사를 훈령했다. 이어 1884년 6월 23일 매클레이 부처는 제물포항에 도착, 그 이튿날 서울로 올라가 일본에서 알게 된 개화파 김옥균(1851∼1894)을 통해 고종 임금에게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이에 고종은 교육과 의료 두 가지에 대해서만 윤허(允許)를 내렸다. 간접선교 방식이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매클레이는 이미 전에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한 적이 있는 이수정(1842∼1886)에게 감리교 교리 문답서를 한글로 번역해줄 것을 의뢰하는 등 한국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세워나갔다.

-일본을 떠난 지 13일 만에 제물포에 닿았다. 첫 인상과 그때 상황을 소상히 설명해 달라.

△아펜젤러=제물포보다 부산에서 받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냇가의 돌 위에서 방망이로 옷을 두들기며 빨래하던 아낙네들이 우리를 보자 바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남편 외에 외간남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듯했다. 배의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지만 임신한 아내가 뱃멀미로 많은 고생을 했다. 마침내 우리가 탄 배는 4월 5일 오후 3시, 그토록 기다리고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선착장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봄이었지만 날씨는 몹시 추웠다. 바닷물이 넓고 얕아서 승객들이 안전하게 하선하도록 돕는 삼판선(三板船) 거룻배로 갈아타고 1시간 만에 약 3마일(약 4.8㎞) 정도 떨어진 바윗돌로 된 제물포항에 첫 발을 내렸다.

-언더우드가 한 살 아래인데 아펜젤러가 먼저 내렸나.

△아펜젤러=임신 3개월인 아내가 먼저 선착장 바위 위로 사뿐히 뛰어내렸다. 태아가 걱정돼 만류했지만 아내는 이미 배에서 내린 상태였다. 우리 일행이 제물포항에 상륙하자마자 누더기옷을 입은 잡역부들이 몰려와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몸짓으로 숙소를 찾으니 한 인부가 항구 근처에 있던 초라한 일본인 호텔로 안내했다. 다행히 방은 널찍했으나 더웠고, 준비가 잘된 외국 음식은 맛이 있었다. 양탕국(커피의 별칭)의 맛도 기가 막히게 좋았다.

△언더우드=나는 단신으로 왔기 때문에 호텔에서 잠시 여독을 푼 뒤 이튿날 아침 일찍 출발해 해거름에 한양에 도착했다. 고종의 어의 겸 주한 미국공사로 있으며 광혜원을 운영하던 알렌의 집에서 서울에서의 첫 날밤을 보냈다.

-당시 교통수단도 좋지 않았을 텐데. 서울 정동까지 어떻게 왔나.

△언더우드=사람을 태우고 사람이 앞과 뒤에서 들고 걸어가는 ‘가마’라는 것과 조랑말이 교통수단이었다. 두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길은 좁고 고르지 않아 무척 힘들었다. 산은 나무를 거의 구경할 수 없을 정도로 헐벗었고, 흙으로 담을 쌓고 짚을 얹은 버섯 모양의 집들이 다닥다닥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은 훌렁한 바지를 발목에서 묶은 흰옷을 입고 멀거니 구경만 하는 것이었다. 테가 넓은 갓을 쓰고, 한 발이나 되는 긴 담뱃대를 허리춤이나 목 뒤에 차고 있었다.

이동경로는 육로(경인로)였다. 직선거리로 30마일(45㎞) 정도였다. 제물포 선착장(올림푸스호텔 남동쪽)에서 인천도호부(문학초 내 재현)를 거쳐 성현(星峴·근로복지공단인천병원 맞은편 군부대 영내)∼성곡(부천시 여월동)∼고음월리(서울 신월IC)∼양화진(인공폭포 부근)∼애오개(아현감리교회)∼돈의문(서대문)∼제중원(외환은행 본점 앞 화단)으로 온 것으로 생각된다.

△아펜젤러=우리 부부는 사정이 좀 달랐다. 아내가 임신 초기라 홀몸의 언더우드와 달리 곧바로 입경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 전해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여파로 서울 분위기가 험악해서 부녀자가 들어가기에는 매우 위험하다는 충고 때문이었다. 게다가 주한 미국 대리공사로 있었던 폴크(G C Foulk)가 볼 때 우리 부부는 서울에 머무를 거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으며 미국과 조선 조정과의 외교관계로 볼 때에도 불청객에 불과했다. 인천 개항장 근처에서 1주일 정도 머무르다가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언제 다시 제물포에 들어왔나.

△아펜젤러=우리 부부는 스크랜턴의 부인과 모친을 대동하고 6월 20일 제물포에 들어왔으나 이번에도 입경 자체가 순조롭지 못했다. 스크랜턴 가족은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6월 21일 알렌의 집에서 여장을 풀었는데 반하여 우리 부부는 초가집을 세 내어 처음보다 훨씬 더 긴 38일 정도를 내리교회 주변에 머물면서 조심스럽게 복음을 전하다가 7월 29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제물포 입항의 역사적 의의와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아펜젤러=우리가 들어온 뒤 민중 계몽운동이 파죽지세로 일어났다. 우리는 교회를 세워서 직접적인 선교를 하기 전에 학교와 병원을 세워 이른바 ‘개화(開化)’라는 사회변혁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자기 이름을 갖지 못하고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여성들을 계몽시키고 그 지위를 격상시키는데 초기 기독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한국인 특유의 영성에 기독교 복음을 접목시켜 수많은 선각자들을 길러냈다.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교회 성장을 불러왔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봉건주의에 젖어있던 사회를 개혁하는 주역들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독립운동의 근간 세력으로 성장해나갔다. 또한 급성장한 한국교회는 안팎의 숱한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고 선교대국으로 발전했다. 이에 광복 70주년을 맞아 민족 복음화와 통일은 물론 세계 복음화를 위해 한걸음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아펜젤러=내일이면 우리가 이 땅에 온 지 130주년이 된다.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일찍 떠났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기도해왔다. 오는 16일이 세월호 참사 1주기다. 슬픔이 있는 곳이야말로 진정한 성지다. 한국교회가 이 세대의 아픔을 잊지 말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일에 혼신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도움말 주신분 : 조경열 아현감리교회 목사, 최재건 연세대 신과대 연구교수,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 김흥규 인천내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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