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여성의 방송 진행 늦은 밤엔 금기시 제가 그걸 깼지요 기사의 사진
1960년대와 70년대 방송국에서 일할 때의 임국희씨. 당시엔 PD나 작가 지원이 제대로 안돼 진행자가 방송할 앨범이나 편지를 직접 고르거나 자료를 찾아야 했다. 임국희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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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는 아직도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했다. 말이 속사포처럼 빠르면서도 발음은 정교했다. 소녀처럼 유쾌한 웃음과 함께 간간이 터뜨리는 유머도 돋보였다. 1970년대와 80년대 MBC 라디오 '여성살롱 임국희예요'를 진행하며 전국 여성들의 귀를 사로잡았던 원로 아나운서 임국희(77)씨. 그가 지난달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에 선출됐다. 1961년 KBS 공채로 아나운서가 된 임씨는 MBC로 옮겨 '한밤의 음악편지'(64∼72년)와 '여성살롱'(75∼88년)으로 명성을 쌓았다. TBS(교통방송)에서 음악 프로 '뮤직 투 뮤직'을 진행하던 2003년까지 42년간 방송생활을 했다. 그의 과거와 현재를 들어보기 위해 국민일보 회의실에서 만나 2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했다.

-‘한밤의 음악편지’와 ‘여성살롱’ 중 어느 프로에 더 애착을 느낍니까.

“두 프로는 성격이 아주 다릅니다. 한밤의 음악편지에선 초보 아나운서 시절 재미있는 사연과 함께 팝송을 들려드렸고요, 여성살롱은 여성들을 위한 의미 있는 교양 프로그램이었죠. 저로서는 둘의 순서를 매길 수 없습니다. 호호호.”

-한밤의 음악편지는 방송에서 팝송을 매일 틀어준 최초의 프로라는데 어떻게 해서 기획되었나요.

“AFKN 방송을 벤치마킹한 겁니다. 미국에 사는 애인이 주한미군 병사에게 보낸 편지를 여성 DJ가 읽어주는 데 착안했습니다. 우리도 한번 해보자고 해서 밤 11시부터 12시까지 그런 식으로 진행했는데 대박을 친 셈이었죠. 당시에는 아침 7시 이전과 밤 10시 이후에는 여성 아나운서가 방송에 나가는 걸 금기시할 때였는데 제가 처음으로 그걸 깼습니다. 방송국에 남녀 화장실이 구분돼 있지 않을 정도였으니 옛날 얘기지요. 저의 감미로운 내레이션이 젊은이들의 슬프고 기쁜 사랑 얘기를 효과적으로 전한 것 같습니다. 대부분 생방송을 했기 때문에 밤 12시 통금 후에는 회사 지프로 퇴근하기 일쑤였습니다. 크리스마스 때는 인기가 좋아 경영진 지시로 새벽까지 방송하곤 했어요.”

-원래 음악에 취미가 많았습니까.

“관심은 있었지만 방송하면서 배우고 공부했지요. 방송하는 사람에겐 정보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구해 틀어주면 청취자들이 용케도 좋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당시엔 PD가 여러 프로를 동시에 맡아서 일했기 때문에 특정 프로에 집중하기 어렵고, 작가도 없었기 때문에 제가 거의 직접 준비하고 진행했습니다.”

-‘여성살롱’은 사람 이름이 들어간 최초의 방송 프로라던데 회사에서 인정을 많이 받은 모양입니다.

“오전 11시, 12시 무렵은 청취율이 매우 낮은 어중간한 시간대입니다. 뭘 할까 고민하다 제 전공인 ‘편지읽기’에 착안했습니다. 처음엔 제가 가짜 편지를 몇 번 써서 내보냈어요. 예를 들어 ‘흔히 침묵은 금이라고들 말하지요. 그런데 수다는 다이아몬드라고 쓴 편지가 여기 와 있네요’ 같은 것 말이죠. 그랬더니 며칠 후 진짜 편지가 쏟아져 들어왔어요. 편지를 재미있게 읽어주고 사연에 맞는 음악을 들려주는 식이었는데 오랫동안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교양의 오락화’에 성공한 것이라고 봅니다. 처음에는 계몽에 치중하다 점차 정보 제공과 오락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프로의 성공 비결은 역시 아나운서의 속도감 있으면서도 맛깔 난 진행 솜씨겠지요.

“그때 저 진짜 공부 많이 했습니다. 1년에 단행본을 200권 이상 읽었습니다. 여성 관련 서적을 찾으려고 청계천 헌책방에도 많이 다녔어요. 물론 신문이나 잡지도 섭렵했고요. 재미있는 표현이나 형용사가 제게 꽂히면 그걸 곧바로 방송에 활용했습니다. 그런 노력 안 하면 좋은 진행을 할 수 없지요. 매일 2명 정도씩 게스트를 출연시킨 것도 좋은 전략이었습니다. 소설가 만화가 의사 교수 신부 등 직업을 가리지 않고 초대해 대화를 나누는 게 청취자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봐요.”

-편지가 많이 왔을 텐데 그걸 다 어떻게 처리했나요.

“편지가 너무 많아 고르는 데 애를 먹었어요. 봉투 열기가 힘들어서 한약재 썰 때 사용하는 작두까지 동원할 정도였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을 활용했지만 결국은 제가 직접 읽고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재미있는 편지 글을 묶어 책(‘바구니에 가득찬 행복’)으로 내 베스트셀러를 만든 적도 있습니다.”

-여성살롱 진행할 때 목소리 예쁘다고 만나자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여성살롱 때보다 한밤의 음악편지 할 때 목소리가 섹시하다는 소릴 많이 들었어요. 경기중학교 학생들이 사인 받겠다며 쳐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1960년 무렵에는 아나운서가 생소한 직업이었을 텐데 어떻게 아나운서가 되었습니까.

“여자라면 교사가 최고의 직업일 때인데도 저는 왠지 교사가 싫었어요. 교사만은 안 한다고 했던 말이 씨가 된 것 같아요. 대학 시절 KBS에서 대학생 방송극 콘테스트 비슷한 걸 했는데 억지로 불려나갔다가 경상도 술집아줌마 역을 맡아 그걸로 뜻하지 않게 연기상을 받았어요. 제가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해 경상도 말을 좀 했거든요. 그 다음해에도 상을 받았고, 그러면서 남산에 있던 방송국에 드나들면서 방송 일에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는 모든 게 비밀이었어요. 졸업하면서 곧바로 결혼을 했고, 그 직후 KBS 공채에 응해 합격했지요.”

-KBS에서 금방 왜 MBC로 옮겼습니까. MBC에선 곧바로 중요한 프로를 맡은 거지요.

“당시 KBS 직원은 모두 공무원이어서 아주 가난했어요. 옮길 때 월급이 5000원에서 1만2000원으로 올려줬어요. 1966년인가 한밤의 음악편지 할 때였는데, 둘째아이를 낳고 2주쯤 있다 출근하겠다고 전화를 했더니 간부가 하는 말이 ‘미스 임은 LA 같은 데 가서 공부를 더 하는 게 좋지 않겠어’라고 했어요. 틈만 나면 여자를 쫓아내려고 하던 시절이어서 아차 그만두라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어요. 하도 화가 나서 그 자리에서 사장한테 전화를 걸어 ‘저보고 그만두라는 게 최고경영자의 뜻이냐’고 따져 물었지요. 그랬더니 사장 말씀이 ‘무슨 소리냐. 너는 많이 (돈) 벌어준다. 계속 일해’라며 막아준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요.”

-결국 1974년 프리랜서 선언을 했는데 그땐 흔하지 않은 일이지요.

“사실상 타의였습니다. 여직원들은 결혼이나 임신을 하면 그만둔다는 각서를 쓰고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그 전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했는데, 회사가 각서를 요구하면 다들 ‘임국희는 잘 다니는데’라고 말하곤 했지요. 제 기억에 박선영(물망초재단 이사장, 전 국회의원) 아나운서 혼자 각서 쓰길 거부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게 더 낫겠다 싶어 미련 없이 나와 버렸지요.”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어땠습니까. 또 아나운서는 어떠해야 합니까.

“참 재미있고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울 것도 참 많습니다. 아나운서가 꼭 많은 지식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사람들이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는 정도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표준이라 함은 보통이나 중간이란 뜻이라기보다 모범이란 의미겠지요.”

성기철 논설위원 kcsung@kmib.co.kr

국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www.kmib.co.kr)에서 임국희씨의 현재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제 목소리 기억하세요?.mp4>

70~80년대 MBC라디오 '여성살롱 임국희예요'를진행했던 임국희 아나운서를 기억하시나요?12년전 은퇴했다가 최근 아나운서클럽 회장으로복귀하셨습니다. 70대 후반이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하고 짱짱하시네요. ^^반갑습니다. 최근 본보 성기철 논설위원과 인터뷰를 하셨는데요. 목소리 먼저 들으시고요. 기사는 8일자에 실릴 예정입니다. 기대해주세요~

Posted by 국민일보 on 2015년 4월 5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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