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믿음의 딸들, 구국운동에 온몸 바쳤다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⑦고난 속 꽃핀 女性 크리스천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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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 항일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 검거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기독 여성 독립투사의 모습. 어윤희 유관순 임명애 신관빈 권애라(왼쪽부터). 오른쪽 사진은 이들이 갇혀 있던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 입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제공·강민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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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세상에 나서 나라가 없고 보면 짐승만도 못합니다. 개도 죽으면 임자가 와서 개 값을 받으러 오는데 나라 없는 백성은 이 사람 저 사람이 때려 죽여도 '왜 죽였냐'는 말 한마디 안합니다. (중략) 어떤 고난과 죽음이 닥쳐오더라도 독립정신 하나만은 잃지 말고 남북이 통일된 완전한 독립국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전도부인(여성 전도사)으로 개성 지역 3·1운동을 주도한 어윤희(1880∼1961) 장로가 1961년 3월 1일 서울 중앙여고에서 한 강연 내용 중 일부다. 어 장로처럼 일제 치하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여성들은 성경 속 이스라엘의 민족해방에 영감을 얻어 민족독립의 소망을 품고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국권 상실의 암담한 상황에도 항일운동에 적극 가담한 기독 여성이 상당수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들은 신앙전파와 독립운동에 힘썼을 뿐 아니라 여성 교육과 남녀평등사상 전파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개성의 유관순’ 어윤희 장로=어 장로는 1880년 6월 충북 충주군(현 중원군) 소태면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4세에 혼인했으나 남편은 결혼한 지 3일 만에 동학군으로 출정해 목숨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17세 되던 해인 1897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혈혈단신이 됐다.

의지할 곳이 없어진 그는 고향을 떠나 황해도 평산과 해주 등지를 전전하다 1909년 개성북부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입문했다. 그해 미국 선교사 갬블(1880∼1969)로부터 세례를 받은 어 장로는 개성의 미션스쿨 미리흠여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학업을 마친 뒤 남감리교 계통의 미션스쿨인 호수돈여학교에 진학한 그는 졸업 후 30대 중반에 전도부인 생활을 시작한다. 황해도 금천군 매동교회 등 농어촌 산간벽지의 교회를 주로 찾아다닌 그는 복음전파, 여성 문맹퇴치,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그가 개성 지역 3·1운동의 주도자로 가담한 건 민족대표 33인이 종교조직과 학생조직을 주로 이용해 전국에 만세운동 계획을 알렸기 때문이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화영 목사는 1919년 2월 28일 독립선언서 100부를 비밀리에 강조원 개성북부교회 목사에게 보냈다. 하지만 대중에게 이를 전달할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강 목사의 고민을 들은 교회 주일학교 교사 권애라는 호수돈여학교 선배인 어 장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운동 취지에 공감한 어 장로는 전도부인 신관빈과 함께 그해 3월 3일 개성 거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했다. 학교 후배와 여성들, 교회 청년들이 어 장로 뒤를 따르며 만세를 불렀고 이를 들은 개성 시민 1만여명이 즉시 만세운동에 동참하면서 대규모 항일시위로 발전했다.

이 일로 어 장로는 일본 경찰에 연행돼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됐다. 그해 4월 11일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은 그는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 수감됐다.

강영심 이화여대 사학과 연구교수는 “어 장로의 개성 지역 독립선언서 배포 활동은 여성이 주도적으로 시민과 학생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이끌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며 “모두가 만세운동을 망설일 때 자기희생적인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건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확고한 민족의식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여성 독립투사의 옥중투쟁 본부,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어 장로가 수감됐을 당시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는 다수의 기독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돼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유관순(1902∼1920) 열사다. 이화학당 학생이던 그는 고향 충남 천안에서 17세에 3·1운동을 주도하다 감옥에 갇혔다.

이들뿐 아니라 당시 그 방에는 어 장로와 만세운동을 한 전도부인 신관빈(1885∼미상) 심명철, 주일학교 교사 권애라(1897∼1973) 등이 함께 있었다. 시각장애인 전도부인 심명철은 개성 지역 만세운동을 벌이다 탄압하는 일본 기마병 행렬에 뛰어든 뒤 군중에게 만세운동 참여를 호소하다 체포됐다. 체포 당시 그는 “내 눈이 멀었다고 마음도 먼 줄 아는가.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호소로 만세를 부른 것뿐이다”라며 경찰의 포박에 거세게 항의할 정도로 담대했다.

대부분 기독교인이던 수감자들은 모진 고문을 당한 서로를 위해 기도했다. 최은희 여성중앙 기자가 1983년 쓴 ‘한국 개화여성 열전’에 따르면 어 장로가 유관순 열사를 옥중에서 돌본 이야기가 나온다. 어 장로는 몸집이 크고 어린 유관순에게 금식기도를 핑계로 자기 몫의 밥을 먹였으며 고문을 당할 때마다 어루만지고 위로해줬다.

감옥에서도 이들은 항일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 단원이자 전도부인 이신애(1891∼1982)는 유관순 등과 뜻을 합하여 1919년 12월 24일 옥중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 일로 이신애와 유관순은 심한 고문을 당했다.

무자비한 고문과 탄압에도 기독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옥중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 17개 여옥사 수감자들은 ‘통방(이웃 감방 수감자끼리 암호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이용해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운동을 논의했다. 1920년 3월 1일 감옥에 만세 소리가 이어지자 일제는 유관순과 심명철을 주요 인물로 지목했다. 잦은 구타와 고문에 시달린 유관순은 결국 옥중에서 순국했다.

옥중 만세운동은 캐나다 의료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박사에게 큰 감명을 줬다. 스코필드는 자주 8호 감방에 들러 기독 여성 독립운동가를 위로했다. 또 열악한 감옥 환경을 외부에 고발했다. 이곳에서 어 장로와 인연을 맺게 된 스코필드 박사는 자신보다 12세 연상인 그를 ‘누님’이라고 부르며 출소 이후에도 평생 의남매로 지냈다. 1969년 서울 마포구 서강감리교회 어윤희 장로기념관 정초식(건축에서 초석을 놓는 의식)에서 그는 “내가 한국에 와서 참다운 크리스천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분이 어 장로”라며 “그는 참 신앙인이요, 참 애국자이며, 참 봉사자”란 말을 남겼다.

강 교수는 “개항 이후 추진된 정부 주도의 근대적 교육과 기독교 선교사들의 교육으로 기독 여성들은 독립운동에서 다양한 활약을 했다”며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남녀평등·항일구국운동에 헌신한 기독 여성 독립운동가는 종교의 틀을 넘어 여성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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