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태화산 솔바람은 義人을 숨겨주고 기사의 사진
태화산 솔바람길. 구성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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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 충청도 일대에서 봄에는 마곡사(麻谷寺)의 꽃과 신록, 가을에는 갑사의 단풍을 구경하라는 말이다. 봄기운을 느껴보고자 지난 6일 태화산 마곡사로 향했다. 벚꽃이 피기에는 조금 이를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벚나무는 낮은 지대에만 한두 그루 꽃망울을 터뜨렸을 뿐 전반적으로 아직 겨울 분위기다. 하긴 여의도에서 본 벚꽃은 왕벚나무 꽃이고, 이곳에서 흔히 보는 산벚나무나 벚나무는 개화가 더 늦다.

충남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 입구 주차장부터 1㎞ 남짓 걸어 들어가는 길도 매화와 산수유 꽃 몇 그루 외에는 나목이 풍경을 지배한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 마곡천변의 날씬한 층층나무가 촉새 주둥이 같은 잎을 틔웠고, 서어나무가 하늘하늘 연두색 꽃을 매달았다. 나뭇가지를 감싸고도는 붉은 빛의 물 기운과 새싹들에서 봄은 차고 넘친다.

마곡사는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으려고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혐의로 옥살이했던 청년 김구가 23세 때인 1898년 가을 탈옥한 직후 숨어들어 이듬해 봄까지 지냈던 곳이다. 백범 선생이 이곳에 은둔한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정감록은 난세에 총칼과 기근을 피할 수 있는 은둔처로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선정했는데 이곳 마곡사 일대도 포함됐다. 충남 공주군 유구읍(維鳩邑)과 마곡사의 두 물줄기가 산과 서로 휘돌아 가며 S자로 감기는 곳이다. 이곳 노인들은 6·25전쟁이 지나간 줄도 몰랐다고 한다.

마곡사는 김구 선생과의 인연을 기념해 사찰 앞마당 한쪽에 백범당을 조성했다. 이곳에는 백범의 친손자인 김양 전 국가보훈처장이 2009년 10월 기증한 백범의 휘호가 걸려 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백범이 즐겨 인용했던 휴정 서산대사의 선시(禪詩)다. 바로 옆에는 선생이 1946년 다시 마곡사를 찾아와 심었다는 향나무가 서 있다.

마곡사가 터 잡은 태화산에는 소나무가 많다. 수령 100년 안팎의 소나무와 어린 소나무들이 높지 않은 산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다. 여기에 새로 낸 걷는 길 이름도 마곡사 솔바람길이다. 3개 길 가운데 1코스인 ‘백범명상길’을 따라 냇가로 접어드니 목조 데크가 나타난다. 물소리가 귀를 가득 채웠다. 한 옆에 조성된 공간에 백범이 출가할 때 삭발했다는 삭발터가 나타났다. “얼마 후에 나는 놋칼을 든 사제 호덕삼을 따라서 냇가로 나아가 쭈그리고 앉았다. …이미 결심을 한 일이건마는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떨어짐을 금할 수 없었다.”(백범일지)

셋째 코스인 ‘송림숲길’을 따라 태화산을 올랐다. 소나무가 우점종인 숲 속은 솔바람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불어오는 바람에 땀이 금방 식는다. 비는 그쳤지만 빗물에 젖은 솔잎들이 흔들리면서 습기 머금은 소리를 전달한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은 솔바람 소리를 ‘송운(松韻)’ ‘송성(松聲)’이라 칭하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천연송림욕장에서 고개를 들어보면 적당히 구부려 가면서 자란 젊은 소나무들이 하늘을 찌른다. “신령한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오면 그 소리가 퉁소 소리를 뒤덮는다. 뿌리는 황천(黃泉)에 뻗어 내리고 가지는 푸른 하늘을 어루만진다. 이렇게 하면 대궐의 기둥을 세우고 큰 집의 들보로 쓸 수 있으니 온갖 나무 중에 으뜸이라 하겠다.” 당나라 문인 부재(符載)의 ‘식송론(植松論)’에 나오는 구절이다.

활인봉까지 올라간 후 2코스로 경로를 변경해 백련암으로 내려온다. 백련암 바로 위의 숲길 오른쪽은 소나무, 왼쪽에는 서어나무 군락이다. 새소리에 귀가 먹먹하다. 백련암은 백범이 주로 머물던 곳인데 여기서 마곡사 쪽을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백범은 이곳에서 소나무 숲길을 산책하면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는데 자신의 안위를 위해 살아도 되는가를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생골마을이다. 다락논과 밭들이 펼쳐져 있고, 장작을 때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산속임에도 물이 풍부한 이곳은 예전부터 자급자족이 가능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지난달 보름부터 말까지 기온이 높아 개화시기가 앞당겨지나 했더니 이달 들어 다소 쌀쌀해졌다. 마곡사의 왕벚꽃과 산벚꽃도, 북한산의 귀룽나무꽃도 개화가 늦어질 것 같다. ‘꽃을 보러 정원으로 가지 말라. 그대 몸 안에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다.’(인도 시인 카비르) 슬픈 것은, 숲 속에서 다른 온갖 생물들과 맞물려 피는 꽃들과 달리 지금 우리 사회의 날선 갈등에 휩싸인 사람들 안에서는 꽃이 필 조짐이 없다는 것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이 계절, 젊은 백범도 그렇게 느꼈을까.

공주=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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