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박원순 시장의 한계 기사의 사진
박원순 서울시장은 머리가 좋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검사를 거쳐 변호사로 활동한 걸 보면 그렇다. 재능도 많은 모양이다. 국회 법무부 감사원 국세청 소속의 각종 위원회에서 위원으로 일했다. 역사문제 사법개혁 부패척결 사회개혁을 다루는 시민사회단체에서 다양한 직책도 맡았다. 눈부신 경력과 활동이 두 번의 서울시장 선거에서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울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을 확정·고시한 박 시장의 최근 언행은 그동안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박 시장은 지난달 24일 봉은사역명 결정을 철회해 달라는 기독교계 인사들과의 면담에서 수재(秀才)가 아닌 듯한 말을 했다.

그는 “서울지하철 2호선 삼성역에 코엑스를 병기(倂記)하고 있다. 9호선과 이중으로 하면 혼란스럽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정치력 민의수렴 떨어지고

삼성역에 무역센터가 병기돼 있는데, 코엑스라고 오인한 발언이었다. 기독교계 인사들이 코엑스의 국제성, 시민들의 편의성, 봉은사역의 종교편향성 등을 성의 있게 지적하고 있는데 박 시장이 생뚱맞은 말을 한 것이다.

박 시장의 ‘코엑스 병기’ 발언은 단순한 말실수로 보이지 않는다. 면담은 강남구민과 기독교인이 일관되게 지적한 봉은사역의 문제점에 대해 박 시장이 빈틈없이 공부하고 대화에 나서야 할 자리였기 때문이다. 문제해결 의지가 있는 시장이라면 당연히 준비하고 나왔어야 했다. 박 시장이 아무 생각 없이 면담에 임했다면 면피하고 보자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란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박 시장은 면담 자리에서 “지명위원회가 객관적인 절차를 거쳐 역명을 제정했으며, 서울시장은 역명 결정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 시장은 지명위의 공정성을 강조하려고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명위의 면면을 보면 그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위원장은 행정1부시장, 부위원장은 행정국장이 맡고 나머지 7명은 국문학 교통학 등 민간인들로 구성된다.

중앙·지방정부 소속 위원회의 경우 민간 전문가들이 공무원인 위원장과 부위원장의 의중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구조다. 행정1부시장과 행정국장은 인사권을 쥐고 있는 서울시장의 심기를 살펴야 한다. 철저한 갑을관계인 것이다.

박 시장이 친(親)불교 인사인 데다 봉은사 주지까지 만난 걸 알고 있는 행정1부시장과 행정국장, 그리고 이들과 보조를 맞춰야 하는 민간 전문가들이 과연 공정한 결정을 할 수 있는 분위기였겠는가.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이라고 했다.

서울시는 지명위 회의록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박 시장이 서울시 관계자에게 “회의록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중요한 지명위 회의를 하면서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았다는 것을 믿으란 말인가. 회의록을 만들지 않았다면 공무원 책무를 해태한 것이고, 회의록 공개에 따른 파장을 우려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공무원 자격이 없는 것이다.

진정성 의사소통 낙제수준

박 시장은 봉은사역명을 변경하라는 기독교계의 요구와 시민들의 진정 내용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는 “역명을 바꾸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며, 바꿀 경우 더 큰 갈등이 온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한마디로 강남구민과 기독교인의 반발을 무시하겠다는 입장인 셈이다.

그런 박 시장이 지난 5일 연세대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한국교회연합 양병희 대표회장을 만나 “봉은사역은 재심을 신청하면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을 강력히 비판하고 서울중앙지법에 ‘봉은사역명 사용중지 가처분’을 신청한 양 대표회장을 구슬리기 위한 술수일지 모른다. 양 대표회장은 박 시장의 발언에 대해 “진심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정도면 박 시장의 정치력 협상력 민의수렴 진정성 의사소통 공정성은 낙제 수준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염성덕 종교국 부국장sdyu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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