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복음과 민족, 두 기둥 붙들고 구국 선봉에 섰다… 강규찬 목사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⑧ 고난 속 꽃핀 男性 크리스천 지도자들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복음과 민족, 두 기둥 붙들고 구국 선봉에 섰다… 강규찬 목사 기사의 사진
강규찬 목사의 평양신학교 졸업 앨범 사진.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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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길선주 김선두 강규찬 이일영 4인은 지금 경성 감옥에서 수감되어 예심 중에 있사오며.’(1919년 조선야소교장로회 제8회 총회록)

강규찬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는 1919년 10월 평양신학교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회 총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3·1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 투옥됐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삶은 기독교교육운동, 사회계몽운동, 민족운동을 전개하며 한민족을 깨우는 선도적 역할을 감당했던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강 목사는 1874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났다. 선천은 한국 최초의 번역성경 ‘예슈셩교 누가복음젼셔’(1882)를 펴낸 존 로스의 영향을 받은 곳으로 서북지역 복음화를 이끈 도시다. 1902년 44개의 예배처소에 3429명의 성도가 있던 선천은 4년 만에 78개 예배처소, 1만1943명의 성도로 부흥했다.

강 목사는 한시와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직계 제자로 훗날 한국 장로교회의 거두가 된 박형룡(1897∼1978) 박사는 자신의 전도서 주석에 강 목사의 시를 자주 인용했다. 강 목사는 1908년 기독교 학교인 선천 신성중학교 교사로 부임해 5년간 백낙준 박형룡 정석해 등 수많은 지도자를 길러냈다. 신성중학교의 교풍이 어떤지는 졸업가에 잘 나타나 있다.

“청북반석(淸北盤石) 터를 잡은 화려한 신성학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청년을 교육해/ 사회의 중추와 교회의 양재(良才)는/ 오늘날에 졸업하는 우리의 학우일세.”

이처럼 신성중학교의 중요 키워드는 교회, 국가, 민족이었다.

일제는 1910년 조선을 강제로 합병하고 영구 식민화를 위해 국내 반일세력 제거에 나섰다. 대표적 사건이 1911년 10월 발생한 105인 사건이다. 당시 일제는 존재하지도 않은 데라우치 총독 살해음모 사건을 날조해 수백명을 체포했고 그 중 123명을 기소해 105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일제의 주된 목표는 국내 반일민족세력과 서북출신 기독교 지도자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강 목사는 동료 교사 7명, 학생 20명과 함께 구속됐다. 그는 6년 형을 받고 2년간 복역했다.

일제의 감시 때문에 교편을 잡을 수 없게 된 그는 1913년 평양신학교에 진학했다. 이어 1917년 산정현교회에 부임하면서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신성중학교 교사출신으로 기독교교육과 인재양성에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었으며, 목회적·학문적 소양에다 남다른 민족의식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강 목사가 시무한 산정현교회는 자연스럽게 평양뿐만 아니라 전국교회의 모델로 자리 잡았다.

“본 예배당(산정현교회)에서 예배드리는 회중은 약 500명입니다. 그들은 한 탁월한 사람(강규찬)을 모시고 있는데 그 사람은 회중들에게 훌륭한 리더임이 입증되었습니다. 그의 사역 결과는 그 도시에 풍요롭게 현시(顯示)되고 있습니다.”(191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번하이슬 선교사의 편지 중)

당시 주일예배는 오전 10시, 오후 2시, 오후 8시 세 차례 열리고 장년 주일학교는 남자 12반, 여자 16반이 운영됐다. 강 목사의 설교는 젊은 학생과 지성인들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섰다. 산정현교회 약사에 나오는 1918년 교회 모습은 다음과 같다.

“예배당이 협착하여 40평을 증축하였는데 (중략) 유년주일학교를 확장하였는데 남녀 학생이 200여명이었고 장로 김동원씨를 교장에 (임명하고) 남자 청년회를 설치하였다.”

강 목사는 105인 사건으로 기소되거나 유죄 언도를 받은 서북지역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1919년 3·1운동을 이끌며 기독교 민족운동의 선봉에 섰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은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이었다. 이 중 중추적 역할을 했던 이승훈은 정주장로교회 장로였다. 길선주(평양 장대현교회) 양전백(선천 북장로교회) 김병조(정주교회) 유여대(신의주 동장로교회) 목사와 이갑성 남산교회 집사, 이명룡 정주 덕흥교회 장로 등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강규찬은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과 인원동원 문제를 논의했다.

“예수교인만이 참혹한 식민정책에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부류의 한국민이다. (중략) 미주 만주 중국에 흩어져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로서 세계정세에 재빨리 반응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모든 동인과 여건이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3·1운동에 앞장서게 하였다.”(1919년 미국기독교연합회의 3·1운동 보고서인 ‘The Korean Situation’)

강 목사는 당시 평양 숭덕학교에 모인 군중들 앞에 섰으며,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일제는 기독교 지도자를 탄압했다. 길선주 양전백 유여대 김병조 목사와 강 목사는 일경에 붙잡혀 투옥됐다. 1919년 장로교 총회록에는 3·1운동에 따른 장로교회의 피해상황이 나온다. 그해 3월 1일부터 6월 12일까지 사망자 41명, 복역자 976명, 태형 928명, 중상자 116명, 집행유예 159명, 방죄·방면 5명, 부상석방 16명, 악형 85명, 상고 중 60명이었으며, 피고인원은 총 2386명이었다. 교회는 31동이 파괴됐다.

강 목사는 1920년 출옥 후 조만식을 비롯한 산정현교회 성도들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을 펼쳤다. 같은 해 교회 내에 여자청년회를 조직하고 유치원을 설립했다. 교회는 한국사회와 교회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 예산의 3분의 1을 투입했다. 그의 영향으로 조만식 김동원 김선두 오윤선 김예진 등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배출됐다.

강 목사는 1933년 산정현교회 사임 후 선천동교회 봉동교회 선천읍북교회 등을 맡았다. 그는 해방을 4개월 앞둔 1945년 4월 9일 71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박용규 총신대 교수는 “강 목사는 시대적 부름 앞에 자신보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사는 삶을 주저하지 않았다”면서 “일제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복음과 민족이라는 두 기둥을 견고히 붙들고 한국교회와 민족을 깨우는 일에 앞장섰다”고 강조했다.

서울 산정현교회 14대 담임인 김관선 목사는 “한국교회는 강 목사처럼 이름도 없이 교회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집중 조명해 민족과 함께한 교회의 역사성을 계승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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