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전웅빈] 딸에게 들려줘야 할 이야기 기사의 사진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1년 전 이맘때 딸아이가 태어났다. 전남 진도 팽목항 인근 여관에서 자다 새벽에 “진통이 왔다”는 아내 전화를 받았다. 예정일보다 보름 빨랐다. 세월호에서 40번째 실종자의 시신이 막 발견됐다. 팽목항엔 밤새 가슴 치며 아이 이름을 부르다 목이 쉰 부모의 마른 눈물이 내려앉았다. 실신한 부모들이 응급차에 실렸고, 몇몇은 “내가 구하러 가겠다”며 바다로 들어갔다가 곧 몸을 붙들렸다. 닷새간 허망한 죽음을 쫓아다니다 느닷없이 생명을 맞이했다.

급히 택시를 타고 목포역으로 가는 길에 다툼을 목격했다. 서울에 가 대통령을 만나야겠다는 유족들을 경찰이 에워쌌다. 진도대교 초입길이 통제됐다. 택시는 도로를 돌았고, 유족들이 발길을 돌리자 겨우 그곳을 빠져나왔다. 용산행 KTX가 광주를 막 지날 때 장인어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방금 나왔다. 아이와 산모 모두 건강하다. 조심히 올라와라.” 감사했다.

해가 질 무렵 처음 딸을 안았던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다. 배냇저고리로 몸을 싸맨 2.5㎏의 작은 생명이 품에서 숨을 할딱거리며 꿈틀댔다. 그 조그만 몸에 무한한 삶의 가능성이 깃들어있을진대 반갑고 슬펐다. 누군가 그랬다. 딸에게 평생의 이야기가 생겼다고. 훗날 아이에게 이날을 어떻게 설명할까. 지난 1년을 돌아보니 가슴이 먹먹하다.

배는 왜 가라앉았나. 정부는 참사 원인을 기업가의 탐욕에서 찾았다. 출산휴가 후 머물렀던 인천지검에는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을 잡겠다는 결기가 넘쳤다. 대대적인 압수수색이 계속됐고, 관련자들이 줄줄이 소환됐다. 압수물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검찰은 그 서류더미에서 혐의를 확정했다. 검찰청사 주변에선 구원파 신도들의 집회가 연일 계속됐다. 곧 결전의 날이 다가오는 듯했지만 유 전 회장은 사라졌다. 검·경·군이 모두 기진맥진할 때쯤 순천 매실밭에서 그는 주검으로 등장했다. 당시 딸이 태어난 지 100일이 가까웠다.

한여름 정치부로 옮겨 국회를 취재하게 됐다. 여야는 ‘세월호 3법’ 협상을 지루하게 반복하고 있었다. 진상을 밝힐 수 있도록 해달라며 유족들이 거리에 나와 단식을 시작했다. 여러 시민이 동참했다. 그 앞에서 폭식투쟁을 하겠다며 햄버거와 치킨, 맥주, 삼각김밥을 먹는 군상들도 나타났다. 여야가 갈리듯 여론도 갈렸다.

큐레이터가 되고 싶다던 지아, 웹디자이너가 꿈인 동혁, 건축가를 꿈꾸던 승혁…. 그들의 죽음과 이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가족의 고통은 개별적인데, ‘세월호’에 묶인 죽음과 고통은 한 덩어리로 취급됐다. 사회는 그들의 고통을 한데 묶어, 잊지 말자는 쪽과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쪽으로 나뉘었다. 가족을 잃은 자들이 왜 머리를 밀어야 했는지 딸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 생때같은 자녀들이 수장되는 걸 모두가 지켜봤는데, 왜 집단으로 갈렸는지 답을 할 수 없다.

교황이 유족들을 위로했다. 멀리서 위로를 구하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은 겨울까지 계속됐다. 정치인 몇 명은 설화로 곤욕을 치렀다. 유족들은 국회의사당 현관 앞에 노숙했다. 대통령은 국회를 방문했지만 유족을 만나지는 않았다. 실종자 9명의 가족이 11월 스스로 수색중단을 요청했다. 정치권은 온갖 추태 끝에 가까스로 세월호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왜 잊지 말아달라고 하는가. 언제부턴가 먹고사는 문제가 전면에 등장했다. 배가 가라앉은 후 국민은 웃음을 잃었고 경제는 활기를 잃었다. 고깃집이 문을 닫고 노래방이 문을 닫았다며 걱정하는 정치인들이 늘었다. 세월호 이야기도 줄었다. 그 무렵 아내는 직장에서 “일찍 복귀할 수 있느냐”는 전화를 받고 휴직연장을 부탁했다. 육아휴직 급여가 중단될 때의 월급과 대출이자, 생활비를 셈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논리가 스멀스멀 기어들어왔다. 세월호 의인이 생활고와 트라우마로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곧 딸의 첫돌이다. 팽목항에 외지인들이 다시 늘었다. 4월이 가까워 오면서 세월호 소식이 신문 지면을 다시 조금씩 채워갔다. 무력한 싸움 끝에 겨우 합의한 세월호 특별법은 시행령 문제로 아직 온전히 태어나지 못했다. 광화문에 유족들이 다시 모였다. 시민들과 함께 거리를 걷다 수십명이 연행됐고, 풀려났다. 참사 1주기 전국 126곳에서 밀린 숙제를 하듯 추모행사가 열렸다. 정리된 게 없다.

내 기억도 무뎌졌다. 그때 기록들을 다시 들춰본다. 망각은 그렇게 찾아오고 있다. 훗날 딸에게 ‘그날들’을 제대로 들려줄 수 있을까.

전웅빈 정치부 기자 imung@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