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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손수호] 반짝반짝 ‘북서울미술관’

변두리 핸디캡 넘어서는 기획전으로 승부… 서울-지방 교류하는 글로컬 뮤지엄 바람직

[청사초롱-손수호] 반짝반짝 ‘북서울미술관’ 기사의 사진
서울 성곽을 걸어보면 도성의 구성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북악산 자락의 대궐을 중심으로 궁성이 둘러싸고 사대문으로 차폐하는 기능이 핵심이다. 나름대로 탄탄하게 유지되던 질서는 일제에 의해 깨지고, 근대화 이후 도시가 팽창하면서 남진을 거듭해 한강을 끌어안기에 이르렀다. 원도심에는 아직도 시간과 역사의 두께가 주는 위엄이 살아 있다.

내가 일하는 노원(蘆原)은 도성에서 한참 떨어진 외곽이다. 불암산과 수락산의 풍광이 수려하고, 우이천과 중랑천이 만들어낸 4계(상계, 중계, 하계, 월계)가 있지만 한강이나 청계천에 비할 바는 아니다. 북서울꿈의숲이라는 대규모 공원도 예전의 드림랜드보다 나은지 의문이다. 인공의 냄새가 너무 강한 탓이다. 문화로 보면 변변한 공연장 하나 없는 불모지나 다름없다.

이처럼 메마르기 짝이 없는 ‘갈대의 들판’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하나를 발견했으니, 바로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북서울미술관이다. 물론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지나가는 버스 창문 사이로 비치는 겉모습을 보면서 또 하나의 따분한 공립미술관이 들어섰구나 생각했다. 블록버스터 전시로 치장하는 서소문 본관, 옹색한 규모에 비해 큐레이션이 너무 강했던 남서울미술관의 불편한 기억이 남아 있던 터였다.

그런데 막상 들어서니 완전 딴판이었다. 무엇보다 입지가 겸손하고 규모가 알맞았다. 버스 정류장이 코앞에 있어 접근성 또한 뛰어났다. 미술관 입구가 공원으로 연결되고, 공원은 주거지역에 둘러싸여 있다. 아이들이 미술관 앞마당에서 분주히 노는 동안 노인들은 무심히 봄 햇살을 쬐고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한 이런 미술관이 좋다.

전시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케테 콜비츠와 엄정순이라는 걸출한 작가가 4월의 동시상영작으로 걸린 것이다. 콜비츠가 누구인가. 1980년대 한국 민중미술의 젖줄이자 중국 목판화운동을 이끈 루쉰의 정신적 지주였다. 일본 오키나와 소재 사키마미술관에서 빌려온 판화 56점을 보니 그 치열한 정신에 오금이 저렸다. 인간의 고통을 휴머니즘으로 승화시킨 콜비츠 판화의 정수를 서울 변두리 미술관에서 만나다니!

엄정순의 ‘코끼리 주름 펼치다’ 전시는 색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작가는 유명 대학에 적을 두면서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본다는 것’의 근본을 찾아 구도자의 삶을 살고 있다. 삼청동 입구에 ‘우리들의 눈’이라는 간판을 내건 1990년대 이후 고집스레 외길을 걸으면서 미술의 개념을 복지와 인권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태국 코끼리를 직접 만져보고 미술로 표현한 시각장애인들의 작품을 보면 코끼리의 본질은 코에 있는지, 섬세한 주름에 있는지, 그걸 구분하는 게 의미가 있는지조차 고민하게 만든다.

전시를 본 이후 나는 이런 미술관이 서울에 10개만 생겨도 도시의 품격과 시민들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외곽에 있다고 주눅 들지 않고 기획력으로 승부하니, 눈 밝은 지방 미술관들이 순회전을 요청하고 나섰고, 지방의 좋은 전시가 서울로 오는 환류 시스템이 가동될 수 있다. 글로컬(글로벌+로컬) 뮤지엄의 표상은 바로 이런 자존감과 당당함에 기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쉬움이 왜 없겠나. 버스로 네 정거장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서 일하는데도 전시 소식을 바로 접하지 못했다.

문화에 관심 많은 대학 학보사 학생기자들도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근데 어떻게 알았냐고? 월간 디자인에 쓴 전은경 편집장의 글을 읽고 미술관으로 줄달음쳤다. 꾸미는 것만큼 알리는 일도 중요하다. 관공서마냥 너무 높은 현관의 데스크도 보기에 불편했다.

손수호 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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