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내 조국을 구해주십시오” 절규 후 순국… 독립운동 기폭제

(제1부) 한국교회와 독립운동-⑨ 네덜란드 上 ‘헤이그서 평화 외친 이준 열사’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내 조국을 구해주십시오” 절규 후 순국… 독립운동 기폭제 기사의 사진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의 ‘더 리드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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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헤이그 중심가에는 ‘기사의 집’으로 불리는 ‘더 리드잘(the Ridderzaal)’이 있다. 600년 된 이 건물은 대형 목재로 된 천장과 고풍스런 내부 장식으로 치장된 네덜란드 국회의사당이다. 네덜란드 국왕은 이곳에서 매년 9월 상·하원 의원들을 모아 놓고 국정 운영방안을 설명하는 ‘킹스 스피치(King’s speech)’를 한다.

108년 전 ‘더 리드잘’에선 세계평화를 위한 전쟁법규를 협의하려고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서울 상동교회 청년회장 출신이자 최고재판소 예심판사 출신인 이준(1859∼1907) 열사는 1907년 4월 부산을 출발해 배와 기차를 이용해 64일 만인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8667㎞ 떨어진 이곳에 온 이 열사는 이상설(전 총리) 이위종(한국공사관 서기관)과 함께 고종의 헤이그 특사 신분이었다. 그의 품엔 ‘대한광무황제친서’가 있었다.

“대한광무황제 이희(고종)는 삼가 글월을 네덜란드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노라. (중략) 우리의 외교권이 피탈되고 우리의 자주권을 잃게 되었노라. (중략) 짐과 온 국민은 울분하여 하늘을 보고 부르짖고 땅을 치며 통곡해도 아무 소용없으니 바라건대 우호호의 정의와 상부의 의리를 베풀어 세계만방에 발의하고 법을 세워 우리의 독립과 국세를 보전되게 하오.”(대한광무황제친서 중)

특사 3명의 목적은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45개국 239명의 대표 및 기자들에게 을사조약이 고종 황제의 뜻이 아니라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인정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3명의 특사는 만국회의가 열리는 기간에 발간된 ‘평화회의보’를 통해 국권을 침탈한 을사조약이 강압에 의한 것이며 효력이 전혀 없다며 3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일본인들은 대한제국 황제폐하의 승낙 없이 행동을 취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황실에 대항하여 무장병력을 사용했다. 일본인들은 대한제국의 모든 법률과 관습을 무시한 채 행동했다.”(1907년 6월 30일자 평화회의보 ‘왜 대한제국을 제외시키는가’)

3명의 특사는 일제의 침략 야욕과 강압적인 침탈을 규탄하고 대한제국이 주권국가임을 천명했다. 평화회의보는 이위종의 회견과 헤이그 특사의 활동을 자세히 보도했다.

“기자: 여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왜 딱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 모임의 평온을 깨뜨리십니까? (중략) 이위종: 우리는 헤이그에 있는 법과 정의의 신의 제단에 호소하고 이 조약(을사조약)이 국제법상 유효한 것인지에 대한 판별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도대체 국제중재재판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우리가 항의해야 하며, 어디서 이 같은 침탈행위를 유죄선고 받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1907년 7월 5일자 평화회의보)

이위종은 7월 8일 국제기자클럽 주최로 개최된 ‘한국에 관한 연설회’에서 유창한 불어로 ‘한국의 호소’라는 연설을 하고 을사조약의 무효와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세계열강들은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갔다며 특사의 회의장 입장을 거부했다. 당시 한국은 네덜란드 외무성이 초청한 47개국 명단 중 12번째에 ‘Coree’로 분명하게 명시돼 있었다. 일제는 1905년 11월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을 앞세워 고종이 신임장을 주지 않았다며 한국대표의 참석과 발언을 저지했다.

이 열사는 회의 참석이 거부된 후인 7월 14일 오후 7시 숙소 헤이그의 ‘드 용 호텔’에서 갑자기 순국한다. 그와 관련돼 자살설, 수술 중 사망설, 심장마비설, 화병으로 인한 사망설 등이 제기되고 있지만 정확한 사인(死因)은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그의 사인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사망증명서와 평화회의보에 나와 있는 이위종의 인터뷰 기사다. “법관이었고 대한제국에 거주하는 이준은 7월 14일 저녁 7시 헤이그에서 사망했다. 나이는 49세. 함경도 북청에서 출생했고 결혼했으며 기타 아는 바 없다.”(이준 열사의 사망증명서)

“이준은 온 나라 전체가 신임할 수 있었던 애국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상심 끝에 죽었으므로 애국자이자 순교자라 하겠습니다. 그는 건강한 신체를 가졌지만 일본으로부터 우리가 겪고 있는 조국의 불행과 잔학한 모욕이 그를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그의 애국심을 자극했습니다. 죽기 며칠 전부터 그는 음식물을 전혀 먹지 않았습니다.”(1907년 7월 20일자 평화회의보에 실린 이위종의 ‘기독교국들을 향한 한국인들의 호소’)

분명한 것은 그의 죽음이 국권을 침탈한 일제의 만행에 대한 절규, 분노와 직결돼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마지막 말도 조국을 위한 것이었다. “몇 시간 동안 그는 마치 의식을 잃은 듯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내 조국을 구해주십시오. 일본인들이 대한제국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1907년 7월 20일자 평화회의보)

7월 15일 헤이그에서 이상설이 보낸 ‘이준 열사의 순국’ 전보가 부인 이일정 여사에게 도착했다. 7월 16일자 ‘뉴코란트 신문’은 다음과 같은 분위기를 전했다. “장례 연설도 없었고, 조용히 침묵하는 분위기 속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같이 왔던 한국 사람이 큰소리로 통곡하면서 울기 시작했고 자기의 삶을 앗아간 것처럼 심하게 통곡했다.” 기사 중 같이 왔던 한국 사람은 이상설이었다. 이 열사의 시신은 ‘니우 에이컨다위넌’ 시립묘지에 안장됐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이 열사의 순국 5일 후 고종 황제를 폐위시키고 7월 말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 열사의 죽음을 퇴색시키기 위해 그해 12월 병사설을 담은 ‘한국정미정변사’까지 펴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이국땅에서 대한독립을 외치다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이 열사의 소식은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군대가 해산된 뒤 군인들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이 열사 순국 2년 뒤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정부는 1962년 이 열사에게 대한민국장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또 순국 56년 만인 1963년 10월 4일 이 열사의 유해를 한국으로 운구해 국민장(國民葬)으로 장례를 치른 뒤 서울 강북구 ‘수유리 선열 묘역’에 안장했다. 이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일성여자중고등학교가 세워졌으며, 지금도 매년 추모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전재혁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장은 “세계만방에 대한독립의 정신을 강렬하게 심어준 이준 열사는 우국지사이자 교육문화 운동의 선구자, 법치와 준법을 설파하고 실행한 민주 시민 운동가였다”고 설명했다. 전 회장은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의 영향을 받은 이준 열사의 기독교 정신은 나라사랑 정신으로 표출됐다”면서 “그의 기독교 사상과 실천력은 사회적 혼란기를 맞고 있는 한국사회에 민족적 좌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헤이그=글·사진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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