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전정희] 윤치호가 몰락한 까닭 기사의 사진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주려고 진고개(서울 명동 일대)에 갔다. 문희와 명희는 일본인 상점들이 화려하게 전시해 놓은 장난감을 보고 신이 났다. 하지만 난 조선이 장난감과 성냥조차 일본에 무기력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에 맥이 빠져 버렸다.’

한때 독립운동가이자 기독교운동가였던 윤치호(1865∼1945)의 1920년 12월 11일자 일기의 한 대목이다. 조선인 최초의 미국 남감리회 교인이었던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 감리교의 ‘대부’이자 조선기독교 원로였다. 송도고보 교장, 이화여전 이사, 연희전문 교장, YMCA연합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청교도적인 인간형이었다. 적어도 그는 1912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돼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특사로 풀려나기 전까지 조선의 개화 지식인으로 존경받았다. 귀족 가문 출신에다 근대적 시민정신을 갖춘 인물이기도 했다. 여기에 청교도적 신앙이 들어갔으니 늘 반듯한 생활태도를 보였다. 학벌, 명망, 재력까지도 두루 갖춰 민족 진영, 사회주의 진영에서 서로 지도자로 모시려 했다.

그는 당대 첫손 꼽히는 크리스천 리더였다. 시대정신만 뛰어났으면 월남 이상재 선생 같은 기독교민족운동가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소설가 이광수가 그러했듯 출옥 후 친일파로 변절했다.

윤치호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물은 60여년간 쓴 일기다. 1883∼1943년 매일같이 일기를 썼다. 주로 영문 일기였다. 1919년 3월 3일 서울 을지로 입구 고종 장례 행렬. 백성은 관대(棺臺)를 향해 모두 통곡했다. 일본 헌병들은 총구를 땅에 겨눈 채 행진했다. 윤치호는 그들 사이에 낀 일본인들의 대화를 드라마 대사처럼 일기에 적었다.

“여기 나와 있는 조선인들은 모두 얌전해. 다만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들만 난폭하지. 그런 놈들은 모두 감옥에 쳐 넣어 유배시키는 게 좋다고.”

교육과 의료 선교로 복음의 씨앗을 뿌린 개신교는 민족교회로서 일제에 항거했다. 그리고 일제 말기 상당수 교회가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친일의 길을 걷게 됨을 그의 일기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같은 해 5월 3일자 일기에 교육자 김창제(YMCA운동가)의 말을 인용해 신앙적 프레임을 드러내기도 한다. “다수의 목소리가 주님의 목소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꼭 그런 건 아니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것도 다수의 요구였잖아요.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얘기도 사실이 아닙니다. 주님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도 바리새인과 헤롯의 연합이잖아요.”

그는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해 ‘애국적이긴 하나 투기, 미신, 허황된 말에…’라고 언급했다. 그 뒤에 가려진 진영 논리의 폐해를 본 듯하다. 또 ‘애국심은 많은 무뢰한들의 피난처다’ ‘지식인이나 지도자들이 수백년 동안 유교 윤리 등 허황된 철학적 사색에 빠져 유용한 기술과 실용적인 도덕을 완전히 무시했다’ 등의 사회 분석과 함께 자강(自强)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가정들이 놋쇠로 된 물건을 하나씩 거두어 조선사령부에 제출했다’(1938년 9월 13일), ‘조선 기독교인이 일본군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위문대를 보내는 운동은 그 발상 자체만으로도 칭찬받을 일이다’(1938년 12월 4일)라고 한 대목에서 보듯 일제 관제 크리스천이 되고 만다.

대체 윤치호는 왜 그렇게 변했을까. 요즘으로 치자면 실업인선교회 리더였을 그의 변절은 바로 ‘60년 일기’에 답이 있다. 화려한 인적네트워크는 두드러지는데 어디에도 영성과 기도가 언급되지 않는 점이다.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것은 쉽게 믿는다’고 했는데 바로 윤치호가 그러했다. 한데 최근 크리스천 경영 리더 몇몇이 자기가 바라는 것만 믿다가 실족해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자신만의 의를 구했기 때문이다.

전정희 종교기획부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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